
위그노 이야기 65
사선에 선 목회자: 넘치는 헌신, 드르랑꾸르
드르랑꾸르 목사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샤 를 르 드 르 랑 꾸 르 ( C h a r l e s Drelincourt, 1595-1669) 목사의 부모는 신실한 위그노였다. 특히 그의 큰 외삼촌은 순교했고, 작은 외삼촌은 파리 교회의 목사로 지명될(안수받은 그 주간에 사망한 탓에 사역은 하지 못했다) 정도로 어머니 쪽은 더욱 독실했다. 부친은 본래 깽(Caen)의 시민이었는데 신교 박해를 피하려고 스당(Sedan)으로 도피해 부일롱 공작의 비서 일을 했다. 이런 연유에서 드르랑꾸르 목사는 1595년 7월 10일에 스당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당시 명망이 높은 스당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소뮈르(Saumur) 아카 데미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618년에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로 임직한 직후 드르랑꾸르 목사는 랑그르(Langres)에 위그노 교회를 세울 책임을 맡았다.
드르랑꾸르 목사는 이제 막 스물두 살을 넘긴 나이였기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랑그르로 갔다. 거기에는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그마치 6백 명 이상 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교회 설립을 준비하는 동안 이웃 도시의 교회들에서 자주 설교를 했다. 아직 랑그르에서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러 지역을 부지런히 다니면서 위그노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랑그르 교회 설립은 무산 되고 말았다. 위그노를 강력하게 압박 하는 루이13세의 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깊은 상처를 받은 드르랑꾸르 목사는 세달 동안이나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며 거의 무덤에 들어갈 뻔하였다.
1620년 초엽, 건강을 회복한 드르랑꾸르 목사는 파리로 이동하였고, 파리 당회로부터 샤릉똥(Charenton) 교회의 목사로 임명받아 삐에르 뒤물랑의 목회를 이어갔다. 샤릉똥 첫 번째 예배당이
파리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기 1년 전이 었다. 1620년 3월 15일에 첫 설교를 한이후 1669년 11월 4일에 74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목회직을 수행하면서 설교자로 혁혁한 명성을 날렸다. 드르랑꾸르 목사는 1625 년에 파리의 부유한 양조자의 딸과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그의 아들들 가운데 로랑(1626-1681)은 목사가 되었고, 샤를르(1633–1697)는 루이 14 세의 왕실의사로 활동하다가 화란 레이든 대학의 의과 교수가 되었으며, 삐에르 (1644-1722)는 제네바에서 교육받은 후에 아일랜드 교회의 목사로 임직하였다.
드르랑꾸르 목사의 설교는 아주 교육 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그는 병자를 위로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가졌 고, 교회의 목회업무에도 상당히 성공적 으로 이끌었다. 그의 펜으로부터 흘러나 오는 글들은 헌신과 논쟁이라는 두 축을 가지고 있었다. 앞의 것은 경건을 특징으로 삼으면서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신자들을 놀라울 정도로 굳건하게 세웠 고, 뒤의 것은 가톨릭의 문제점을 예리 하게 비판하여 쓰라린 회초리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런 면모로 말미암아 위그노 속한 대표적인 귀족들은 드르랑꾸르 목사를 높이 평가하였고, 심지어 영국과 화란 같은 외국의 고위 지도자들이나 대사들이 그에게 현명한 조언을 받기까지 하였다.
드르랑꾸르 목사의 저술 가운데 많은 책이 영어, 독일어, 화란어로 번역되 었다. 몇 가지만 추려보면, “성찬 준비를 위한 기도와 묵상”(1621), “십자가의 멍에와 순교의 영광 아래서 교회의 승리”(1629), “논쟁 요약: 로마-가톨릭의 오류의 요점”(1628; 독역 1634), “신앙문 답서: 기독교의 요점에 관한 간략한 교훈”(1642), “죽음의 공포에 대한 신자의 위로”(1651).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심방”(1669)이다. 그 외에도 많은 설교와 서간이 있다. “논쟁 요약” 은 스무 차례나 인쇄되었고, “신자의 위로”는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책으로 17세기 말까지 자그마치 40 판이나 거듭 출간되면서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다.
드르랑꾸르 목사는 일생의 넘치는 헌신을 뒤로 하고 임종을 앞둔 마지막 주일인 1669년 10월 27일에 시편 51:7-8 을 본문으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라는 설교를 했다. 죽음을 준비 하는 설교였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기를 육체와 영혼의 모든 더러움에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는 루이 14세가 위그노 탄압에 박차를 가하는 시점에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후임자 다이으(Daille) 목사에게 “하나님께서 나보다 사역을 더 잘 수행할 목사들을 세워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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