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4_사선에 선 목회자: 넓은 발의 좁은 길, 뒤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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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64

사선에 선 목회자: 넓은 발의 좁은 길, 뒤물랑

 

[삐에르 뒤물랑. Wikipedia 자료]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삐에르 뒤물랑(Pierre Du Moulin, 1568.10.16.-1658.3.10.)은 1568년에 오를레앙 지역 위그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위그노가 우세한 도시 스당(Sedan)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 학교는 1579년 위그노 운동을 열정 적으로 지지하던 프랑수와즈 부르봉 (Françoise de Bourbon) 공작 부인의 후원으로 세워졌고, 1601년에 아카데미로 발전하였다(1681년 폐교). 뒤물랑은 이후 유럽의 여러 신교 국가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1588년 그는 먼저 영국으로 피난하여 런던과 케임브리지에서 4 년 동안 수학하였고, 1592에는 네덜란드 레이던으로 건너가 철학 교수로 활동 했다.

1598년, 뒤물랑은 파리 교회의 요청 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당시 목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3월, 파리 교회에서 목사직을 받고, 파리 동쪽 샤릉똥(Charenton) 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해 두각을 드러냈 다. 당시 파리에는 위그노 교회가 금지 되었고 20km 밖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리뉘(Grigny)에 있는 영주의 땅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601년 16km 떨어진 아블롱(Ablon)으로 옮겼 고, 1606년부터 샤릉똥에서 예배를 드렸다.

뒤물랑은 뛰어난 설교자였다. 그는 앙리 4세의 여동생 까뜨린느의 종사 목사로 활동했다. 위그노 신앙에 독실한 까뜨린느는 루브르 궁에서 처음으로 위그노 왕실 예배를 시작했고, 퐁뗑블로 성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1600년대에 들어서자 뒤물랑은 가톨릭에 맞서서 영국의 제임스 1세를 강력한 후원자로 삼아 개혁파, 루터파, 영국국교회를 연합시키는 신교 연맹을 구상했다. 그는 신교 국가들의 정치계와 폭넓은 교분을 오래전
부터 나누고 있던 위그노 정치인 뒤플레 시-모르내를 영입했다. 그러나 이 원대한 구상은 교파 사이의 신학적 차이와 1618년 이후 잇따른 종교·정치 사건들로 말미암아 무산되었다.

1612년부터 뒤물랑은 위그노 교회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 1612년 제20 차 쁘리바(Privas) 총회를 비롯한 여러 회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는 위그노에게 매우 힘들고 위험한 상황 이었다. 1618년, 그는 세 명의 동료와 함께 네덜란드 도르트레히트(Dordrecht) 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루이 13세가 사형을 언급하며 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하지만 그는 제23차 알레스(Alès) 총회(1620)에서 도르트 레히트 결정을 따라 예정론의 정통 교리를 확립시켰다.

프랑스 왕정은 뒤물랑이 영국과 밀접 하게 교류하는 것을 의심하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실제로 뒤물랑은 1615년에 제임스 1세의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캠브리지 대교회의 협력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체포될 위험을 감지하고 1621년 위그노 지역이었던 스당으로 이동하였다. 부일롱 (Bouillon) 공작은 그를 환영하며 위그노 교회의 목사로 세우고, 스당 아카데 미의 신학 교수로 임명하였다. 1624년에 그는 다시 제임스 1세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위그노 교회의 목사로 섬겼다. 하지만 이듬해 제임스 1세의 사망으로 그는 다시 돌아가야 했으며, 루이 13세가 파리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1658년 사망할 때까지 나머지 인생의 대부분을 스당에서 보냈다.

뒤물랑은 다작의 인물이다. 1607년, 성찬론에 관한 변증서를 펴내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와 화체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622년, 박해 시기에 스당 에서 신자의 신앙적 투쟁에 관한 글을 썼다. 이후 1634년, 소뮈르(Saumur) 학파의 아미로(Moyse A my raut, 1596-1664)가 예정론을 다루는 논문 에서 타협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는데, 이것은 깔방의 이중 예정론을 따르는 진영과 아르미니우스의 자유의지론을 따르는 진영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아미로의 견해는 도르트 결정을 따르고 있던 위그노 교회에 거의 10 년 동안이나 큰 혼란을 초래했다. 여러 총회와 여러 학자들이 아미로를 지지했 지만, 뒤물랑은 아르미니우스를 반박했던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의 견해와 도르트레히트 결정을 따라 아미로를 논박함으로써 교회를 지켰다. 뒤물랑 목사는 국제 사회를 활보한 넓은 발을 지녔지만, 개혁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좁은 길을 간 사람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