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3_사선에 선 목회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메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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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63

사선에 선 목회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메를랑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삐에르 메를랑(Pierre Merlin, 1535 경-1603)은 프랑스 동북부 브르타뉴에 위치한 비뜨레(Vitré)에서 활동한 가장 뛰어난 목사였다. 그의 부친은 도피네 (Dauphiné) 출신으로 저명한 위그노 신학자 쟝-레몽 메를랑(Jean-Raymond Merlin, 1510경-1578)이다. 부친은 로잔 아카데미의 히브리어 교수였는데 (1537-1558), 베른 정부의 압박으로 동료들이 해임되는 것에 반발하여 사직하고 제네바로 이동해서 3년 동안 목회했 다. 1561년에 꼴리뉘 제독의 권유를 따라 파리 목회에 동참했고, 라로쉘에 개혁파를 전하는 일을 맡았으며, 뿌와씨 (Poissy) 회담에 참석하였다. 나바르 여왕 쟌느 달브레(Jeanne d’Albret)의 초청을 받아 베아른(Béarn)에서 개혁파 교리를 전하는 일을 했다. 이후 제네바로 귀환했지만(1564) 정부가 교회에 간섭 하는 것을 거세게 반대하는 바람에 추방되어 고향 도피네로 물러났다가 바뗄 레미 대학살의 여파로 다시 제네바로 피신하였다.

삐에르 메를랑은 부친을 이어 제네바 에서 떼오도르 베자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한 후에 꼴리뉘(Coligny) 제독과 꽁데(Condé) 왕자 같은 위그노 지도 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그도 부친처럼 꼴리뉘의 요청으로 1567년부터 파리 에서 목회를 했고, 1570-1571년에는 잠시 라로쉘에서 지냈다. 메를랑 목사는 바뗄레미 대학살이 시작되는 날(1572. 8. 24) 꼴리뉘 제독이 피살되기 직전까지 그의 곁을 지키다가 극적으로 도피하 였다. 꼴리뉘는 앙리 기즈가 이끄는 군대가 그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딸과 사위, 의사 빠레(Paré)와 메를랑 목사가 곁에 있었다. 꼴리뉘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고는 “나는 인생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긴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도피하라고 요구했다. 사위는 창문 밖으로 나가 지붕으로 도망하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학살자들이 빠레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메를랑 목사는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도망했지만 눈이 너무나 나빠서 멀리 가지 못하고 지붕 밑 건초 더미에 몸을 숨겼다. 며칠을 숨어 있는 동안 암탉이 그의 손에 매일 같이 계란을 낳아준 덕분에 간신히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메 를 랑 의 부 인 과 외 아 들 쟈 끄 (Jacques)는 이틀 전에 라로쉘에서 막도착한 상태였다. 대학살이 시작된 날이웃사람들이 두 사람을 숨겨주었다. 이튿날 그들은 여섯 살 배기 쟈끄를 어떤 여성에게 맡겨둔 채 메를랑 부인을 세느강 건너편에 있는 르네 프랑스(Renée de France, 선왕 루이 12세의 딸)의 주택으로 호송해서 데려갔다. 그들이 돌아와서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 여성은 아이를 데려가려면 돈을 지불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며칠을 힘들게 보내자 화가 치민 주위 사람들이 강제로 아이를 빼앗아 왔다. 마침내 메를랑 목사의 가족 세사람 모두 르네 프랑스의 집에서 보호를 받았다. 자끄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아베 마리아를 부르고 가톨릭 성상들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이유로 후에 부모에게 두고두고 꾸지람을 들었다. 르네가 메를랑 가족을 데리고 파리를 떠날 때 그녀의 마차는 앙리 기즈의 문장(紋章)을 달고 있어서 무사통과하였다. 대학살의 주역 앙리 기즈가 르네의 외손자였기 때문 이다.

제네바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메를랑 목사는 한동안 스위스에 머물다가 브르 따뉴에서 젊은 라발(Laval) 백작을 섬겼다. 이때 비뜨레 교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후일 그는 라로쉘 위그노 교회의 수석 목사로 활동하 였고, 1578년 제9차 총회와 1583년 제 12차 총회에서 의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브르따뉴 교회들은 새로운 위협에 봉착하였다. 낭뜨 행정관 이 가톨릭 연맹에 가담하여 위그노 교회에 상당 기간 박해를 가한 것이다. 메를랑은 비뜨레 체류가 너무 불안한 것을 느끼자 잠시 동안 다른 곳에서 도피처를 찾았고 (1590년까지), 이즈음에, 에스더서에 관한 유명한 설교 주석을 펴냈다(1591년).
메를랑 목사는 연로한 상태에서도 비뜨레 위그노 교회의 수장으로 목회를 계속했다. 1603년 7월 27일, 메를랑 목사가 임종한 후에 비뜨레 시민들은 이구동 성으로 존경과 칭송을 표했다. 그의 아들 쟈끄도 아버지를 따라 목회의 전통을 이어갔다. 메를랑 목사는 브르따뉴의 위그노 교회를 위해 16세기와 17세 기를 연결시킨 인물이다.

[꼴리뉘 제독이 피살된 몽바종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