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2] 사선에 선 목회자: ‘위그노의 은 나팔’ 셩디으

0
6

위그노 이야기 62

사선에 선 목회자: ‘위그노의 은 나팔’ 셩디으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엉뚜완느 셩디으(Antoine de la Roche Chandieu, 1534-1591)는 부르고뉴 출신으로 도피네(Dauphiné)의 오래된 남작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4 살 때 부친의 죽음을 보았고 모친에게 정치에 진출하는 교육을 받았다. 형이 전사한 후에 영지의 상속자가 되었다.

셩디으는 파리에서 유학하는 동안 깔방의 영향을 받은 교사에게 배웠고, 뚤루 즈(Toulouse)에서 공부를 이어가던 중에는 덕망 높은 교수들이 위그노로 회심하여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종교의 길을 바꾸었다. 이후 셩디으는 제네 바로 가서 깔방의 영향 아래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1555년에 파리로 돌아왔는데, 막 파리의 첫 교회가 설립되고 첫 목사 쟝 마쏭(Jean Maçon) 이 목회를 시작한 때였다. 두 해가 지난 1557년에 그는 파리 교회의 목사로 임직하여 초대 목사인 쟝 마쏭을 도왔다.

탁월한 문필가 재능을 지난 셩디으는 국왕의 위그노 박해 정책을 강변하는 가톨릭 신학자와 격론을 벌였고, 신교 진영에서 등장한 회중주의 옹호자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위그노가 1557년부터 1560년까지 겪은 “박해의 역사”라는 책을 출판했다. 위그노들 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북돋우어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박해의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들어있다.

1558년 6월, 18세의 청년 모렐(Jean Morel)은 24살의 남성과 함께 파리에서 체포되어 샤뜰레 감옥에 들어갔다.

모렐은 깔방의 기독교강요를 소지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다. 두 사람은 위협을 이기기 위해 성경을 암송하고 시편 찬송을 소리 높여 불렀다. 모렐은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면 석방과 함께 여러 혜택을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성경 말씀을 떠올 리면서 회개와 함께 이내 진정을 되찾았 다. 그는 1559년 2월 17일에 마침내 이단으로 선고를 받고 서너 날 후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다른 남성은 기적적으로 방면을 받았다. 나바르의 왕 엉뚜완느 부르봉(후일 앙리 4세의 부친)이 체포 다음 날 감옥에 와서 그 사람은 자기 시종이라고 주장하면서 빼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니라 셩디으였다. 만에 하나라도 관청이 셩디으가 파리 교회의 목사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단코 석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셩디으는 목사 임직부터 1563년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그는 제1차 파리 위그노 총회(1559)의 개최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펼쳤다. 여기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와 교회치리서는 셩디으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오를레앙, 뿌와띠에, 샤르뜨르 같은 여러 도시에서 위그노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위임받았고, 제3차 오를레앙 위그노 총회(1562)에서는 의장직을 맡았다.

엉부와즈 칙령(1560)부터 제1차 종교전 쟁(1562) 기간에는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하여 목사가 목회하는 것이 금지될 정도로 위그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셩디으는 파리를 등지고 도피네에 있는 자기의 영지로 물러났고 여러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목회를 하였다.

1563년, 위그노 신앙에 헌신적인 가문의 딸과 결혼하여 28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1568년에는 자기의 영지 마저 몰수되는 바람에 제네바로 도피하 였다.

1570년 생제르맹 협약으로 셩디으는 도피 생활을 끝내고 리용과 부르고뉴로 돌아왔다. 그러나 1572년 파리를 비롯해서 프랑스를 위그노의 피로 물들인 바뗄레미 대학살이 벌어지자 다시 피신 길에 올랐고, 1572년부터 1583년까지 로잔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583년에 다시 피난 생활을 마치고 부르고뉴 뿔르(Poule)에 있는 자기의 성으로 돌아왔다. 1584년, 셩디으는 왕위 계승 서열의 1순위에 오른 나바르 앙리의 군종 목사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1587년 10월에 꾸뜨라(Coutras) 전투에 참전하여 위그노의 대승을 지켜 보았다. 전쟁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리던 셩디으는 몸을 추스르자, 독일과 스위스의 신교 지도자들에게 원조를 청하러 파송되었다(1588). 1589년 앙리 3세의 피살로 말미암아 왕위를 계승 받은 앙리 나바르는 셩디으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였다.

셩디으는 제네바로 돌아가서 1591년 2 월 23일에 사망할 때까지 주일 저녁 설교를 책임졌는데, 깔방(금)과 베자(동) 사이에서 은 나팔로 여겨질 정도로 큰존경을 받았다.

[엉뚜완느 셩디으. Wikipedia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