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회 총회를 앞두고 있다. 우리 총회는 사십사 년 전에 다른 길로 발걸음을 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는 군부정치라는 독재정권에 특정 교단이 편승하고 야합한 상황이었다.
혼탁한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도 갈팡질팡하면서 부침을 반복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교단은 교권 횡포와 지방색에 의한 분열이라는 두 가지 암 덩어리로 말미암아 급격히 붕괴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노력은 정말로 필사적인 것이었다.
먼저 신학생들로부터 저항과 개혁의 거센 함성이 일어났고, 교권정치에 염증을 느낀 교수들이 뜻을 모았으며, 마침내 교단 부패와 학내 사태를 지켜보면서 오랫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박윤선 목사도 이 대열에 들어섰다. 여기에 의식 있는 중견 목회자들이 여기저기에서 가세하여 우리 총회가 출범한 것이다. 우리 교단은 처음부터 대다수 교단들과는 두드러지게 차이 나는 개혁적인 특성을 가지고 다른 길을 모색하였다.
우리가 다른 길을 모색했던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교회는 맘몬을 숭상하는 배금사상으로 찌들고 금권정치의 노리개가 되었다. 세속 정치와 손잡을 뿐 아니라, 오히려 뒷받침해 주면서그 후광을 덧입어 문어발식 목회를 통해 대형화와 기업화를 축복으로 여기는 물량주의에 빠져들었다. 교회의 머리가 되려는 목사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리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교회는 사유화되고 교회의 재정은 전횡되었고, 성도는 교회 성장의 도구로 전락 하였다. 자기 배를 채우려는 목회자들이 야욕의 철권을 휘두르면서 용비어천가식으로 칭송받는 것을 즐겼다. 심지어 영웅화도 부족해서 우상화를 일삼았다. 비도덕적 행태와 비윤리적 작태는 서로 눈감아주는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그때 말기 암 같은 교회의 병폐를 향해 극약처방의 대갈일성이 터졌다. 박윤선 목사는 남을 개혁할 것이 아니라 나를 개혁해야 한다고 외쳤다. 살려고 하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라고 부르 짖었다. 그 외침에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 부르짖음 앞에 아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삼삼오오 모여 열을 올리며 개혁의 의기를 다지고 침을 튀기며 쇄신의 의지를 굳혔다. 그렇게 마음을 내놓고 뜻을 모아 우리가 추구했던 것은 분명히 다른 길이었다.
그리고 다른 길을 따라 걸은 지 어느덧 네 번의 십 년이 훌쩍 흘렀다. 그 사이 우리 교단은 영세하던 면모를 벗고 건장한 몸집을 갖추었고, 초창기 엉성하던 조직 대신에 많은 부분에 안정 적인 체계를 이룩했다. 기존 교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한국교회와 세계 선교를 선도하는 교단이라는 위상을 높였고,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상의 곳곳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혔다. 우리 교단 목사들은 인품이 온화하고 신학이 건전하며 상식적 사고에 실력과 능률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깨끗한 총회라는 높은 인지도 때문에 신문사들과 방송국들이 총회 실황을 취재하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변화와 발전 끝에 우리가 그토록 비판했던 길에 슬그머니 접근하여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우리가 추구했던 다른 길은 옛날이야기처럼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낙엽 한 장 떨어지자 우물에 비친 모습이 일그러지듯이 부서지고 있다. 노인층 목회자는 오랫동안 고생의 시절을 보냈 으니, 이제는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로 과분한 삶을 정당화하거나, 노쇠해지고 병약해지는 것을 염려하면서 노후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수를 던진다. 젊은 층 목회자는 목회를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낭만적 도구로 여기거나, 급속 성장을 꿈꾸며 온갖 세속적인 방식을 끌어모으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슬프게도 교회 문제의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돈 문제가 버티고 있다. 그토록 경계했던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정신인데 마각을 숨기고 있다가 때가 되자 드러난 것일까, 아니면 본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시세를 따라 변질된 것일까?
총회에 즈음하여 모든 목사와 성도가 자신을 냉철하게 살펴보고 야박하게 대하며 자신과 거칠게 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슴을 찢고 목 놓아 울어야 한다. 사무엘의 미스바 집회처럼, 에스라의 성전 앞 집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