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원케 하는 자들이 그립습니다!
전상일 목사 북서울노회 석광교회
요즘 ‘극한 호우’, ‘극한 폭염’이란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어느 때보다 힘든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나라 안팎의 온갖 재해와 분쟁들, 정치와 경제의 불안정, 또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좀체 회복되지 않는 예배와 재정적 어려움을 힘겹게 버티는 교회 상황들이 우리를 더욱 후텁지근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인지 솔로몬이 일찍이 언급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들이 더욱 그립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 능히 그 주인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 라”(잠 25:13).
사도 바울에겐 이러한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머물고 있을 때 그를 후텁지근하게 할 일들로 가득했습니다.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의 위협은 차치하고라도, 그가 애써 세웠던 고린도 교회로부터 들려온 분열과 송사 사건, 예배 무질서 소식 등은 그를 무척 답답하고 후텁지근하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던중 고린도 교회에 파송했던 세 사람의 동역 자(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들이 바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것으로 인해 바울과 교회 공동체는 적잖은 기쁨과 안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후 16:17~18 참조). 여기에서 ‘시원케 하다’는 말은 ‘생기를 주다’, ‘기운 나게 하다’, ‘상쾌함을 주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아나파우오’에서 나온 말입니 다. 이 세 사람은 바울과 교회 공동체 안에 섬기기로 작정한 자들로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모두에게 기쁨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주어 시원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고전 16:15~18 참조).
이젠 우리가 그 시원함의 역할을 감당할 차례입니다. 얼마 전 폭염이 한창 우리 일상과 예배 생활까지 위협하며 극성부릴 때 우리교회 청년들과 젊은 집사들이 교회 전체를 시원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 교회 안에 연세 지긋한 성도들이 매주 뜨거운 화기 앞에서 공동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젊은이들이 직접 나서서 면을 삼고 소스를 만들어 성도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일명 ‘짜장데이’라고 해서 다음 세대들이 기존 세대들에게 정성스럽게 식사를 대접한 것으로 그들 마음 씀씀이가 모두에게 시원함을 주었습니다. 그날따라 기온이 37도까지 오르는 불볕더위였는데, 되레 모두가 느낀 체감온도는 너무나 시원 했던 겁니다.
우리의 목회 현장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시원함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 말의 힘입니다. 바울이 세 사람의 동역자에게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의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 곧 그들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소식들이 그에게 시원함을 주었듯 이, 지금 더위에 지친 우리에겐 서로에게 전하는 한마디 격려가 정말 대단한 겁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씨가 쓴 『당신이 옳다』 라는 책에 보면, 공감의 언어가 얼마나 현대 인들에게 소중하고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를 알게 됩니다. 저자는 “사람의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건 나를 공감해 주는단 한 사람의 존재이다. 공감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심폐소생술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될 수 있으면 서로에게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말라” 고 부연합니다. 사실 이건 누구보다 말을 많이 하는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에겐 더욱 깊이 새길 권면이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 모두에겐 기쁜 소식이었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그 열매가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이었기 에, 우리는 더욱 이런 아름다운 생명의 소식을 가진 자로서, 우리가 만날 모든 이들 에게 아름다운 말로 시원함과 생기를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지금, 이제부터라도 우린 서로에게 시원케 하는 자로서 발걸음을 내디뎠으면 합니다. 곧 우리 말과 태도, 그 영향력에 있어 서로에게 생기와 회복, 소망과 위로를 주는 그런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말 요즘은 시원케 하는 자가 자꾸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