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이야기 59] 사선에 선 목회자: ‘종교개혁의 천사’ 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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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59

사선에 선 목회자: ‘종교개혁의 천사’ 비레

[비레, Bèze의 Icones(1580)]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어느 가톨릭 골수분자가 비레 같은 사람만 있다면 기꺼이 신교로 전향할 뜻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라 ‘종교개 혁의 천사’ 또는 ‘종교개혁의 미소’라고 불렸다. 삐에르 비레(Pierre Viret, 1511-1571)는 로잔을 수도로 삼고 있는 스위스 ‘보’ 주(州)(Canton de Vaud)의 오르브 (Orbe)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비레가 프랑스 종교개혁을 위해 활동했지만 프랑스 인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프랑스 종교개혁자 가운데 유일하게 스위스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비레는 파렐 및 깔방과 함께 스위스 서부의 종교개 혁을 주도한 삼총사 가운데 한 명이며, 비슷한 또래였던 깔방이 속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친구였다. 이런 점에서 제네 바의 ‘종교개혁자 벽’ 부조에 비레 대신 녹스가 서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1527년, 비레는 16세의 나이에 아버지 뜻을 따라 파리 몽때규(Montaigu) 학교에 입학하였다. 오래 전 에라스뮈스가 공부했던 곳이며(1482년), 4년 전에는 깔방이 입학했던 곳이다(1523년). 비레가 입학한 다음 해에는 후일 종교개혁과 심각하게 대립할 예수회 창시자 로욜 라(Loyola, 1491-1556)가 37세의 나이로 입학해서 동문이 되었다. 비레는 고전 어를 비롯한 여러 학문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지만, 종교개혁 사상을 접하면서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오르브로 돌아갔다. 마침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파렐을 만났고(1531년 봄), 인재 발굴의 대가인 파렐에게 발탁되어 복음 전도에 헌신하게 되었다. 1531년 5 월 6일, 비레는 20세의 나이로 오르브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그의 부모도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후 비레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여러 도시에 복음을 전하는 순회 길에 올랐다. 그는 설교자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보통 사람들에게도 종교개혁을 쉽게 이해하는 귀를 열어주었다. 비레는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1533 년, 어느 들판에서 가톨릭 수도승이 비레의 등을 단도로 찔러 치명상을 입히고는 죽은 줄 알고 버려두고 간 적이 있었다.

1535년, 비레는 파렐을 독살하려는 음식을 대신 먹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했 다. 독극물을 음식에 넣은 여성은 즉결재 판에서 살인 죄목으로 곧바로 사형당했 다. 배후를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비레는 사경에서 깨어난 후 여성의 사형 소식을 듣고는 몹시 슬퍼했다. 이후 비레는 몸이 망가진 상태로 삶을 이어갔다.

1536년 10월 초, 로잔 논쟁에서 이긴 비레는 25세의 나이로 로잔 대예배당의 목사가 되었고, 1537년에는 로잔 아카데 미(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장차 벨직 신앙 고백서를 작성할 기 드 브레(Guy de Brès) 도 여기에서 수학한 사람이다. 비레는 보주에 있는 목사들과 함께 교회를 정부(국 가)의 통치 아래 두는 에라스투스 사상에 반대하여 베른 정부와 오랜 마찰을 일으 켰다. 1559년 2월, 결국 베른 정부는 보주의 목사들에게 무조건 항복하든지 아니면 사임 후 추방을 당하든지 택할 것을 요구했다. 30명 이상의 목사가 과감하게 추방당하는 것을 선택했고, 비레도 어쩔 수 없이 제네바로 이동하여 깔방 곁으로 갔다. 1559년 3월 2일, 그는 제네바 목사로 임명되었고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에 일조하였다.

1561년, 비레는 건강 악화를 느끼자 날씨가 포근한 남프랑스로 옮겨갔다. 이후 그의 여생은 프랑스 목회에 집중된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몽펠리에와 님 (Nîmes)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 설립에 힘썼다. 님의 까스토르(Castor) 대예배당은 1561년 성탄주일 예배에서 비레가 설교한 후에 개신교로 바뀐 첫 교회로 이듬해 1월 15일부터 개혁파 예배가 공식 적으로 시행되었고 8천 명이 성찬을 받았 다. 비레는 리용에 가서 1563년 8월에 열린 제4차 총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국왕 샤를르 9세가 발령한 법규(프랑스 밖에서 출생한 목사에게는 설교를 불허 한다) 때문에 1565년에 리용을 떠나야 했고 베아른(Béarn)으로 이동했다. 거기에서 나바르 여왕 달브레는 비레를 오르떼즈 (Orthez) 아카데미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1571년 4월 4일, 제7차 라로쉘 총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던 중에 모든 기력이 녹아내린 ‘종교개혁의 천사’는 하늘로 부르 심을 받았다. 로잔 대예배당 아래 그를 기념하는 길(Rue Pierre-Viret)이 펼쳐져 있고 중간쯤에는 상반신 부조가 새겨진 분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