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그노 망명길을 걷다
김현일 목사
프랑스 그르노블선한열매교회
어느 철학자가 다른 세계관을 마주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말했다. 하나는 책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을 걷는 것이란다. 지난해 나는 위그노 망명길 400km를 걸으며 위그노들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내가 걸어야 하는 믿음의 경주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1685년 프랑스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했던 낭트칙령이 폐지되었다. 칙령 폐지는 잔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프랑스 전체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예배당 파괴, 강제 개종, 추방, 투옥 등. 프랑스는 개신교 신앙이 발붙일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가 없는 상태를 광야(désert)라고 불렀다. 약간의 자유를 주었던 낭트칙령의 폐지로 더 혹독한 광야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아예 신앙의 자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암울한 상황에서 많은 위그노들은 망명을 선택했다. 약 16∼20만 명이 떠났고, 그중 대략 6만 명 정도가 피난의 도시 제네바로 향했다. 내가 걸은 400km는 가장 전통적인 망명길이다. 이 길은 과거 종교개혁 사상이 들어온 길이었다. 일례로 Gap에서 태어났던 기욤 파렐은 1532~1535년 사이에 알프스를 다섯 번 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알프스를 넘었을 때 그의 손에는 올리베탕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이 들려 있었다.
위그노 망명길의 공식 명칭은 ‘위그노의 발자취를 따라서(Sur les pas des Huguenots: GR965)’이다. 2013년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의 공공 및 민간 파트너들(위그노 협회들)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유럽 공인 등산로다. 왜 길일까? 그르노블 대학 정치연구소(IEPG) 피에르 볼레는 위그노와 그들의 망명 역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매개 수단이 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망명길에는 공식적으로 네 구간이 있다. 마리 뒤랑이 38년 동안 수감되었던 여성 감옥 꽁스탕스 탑이 있는 에귀 목뜨(Aigues-Mortes)에서 시작해서 미알레까지의 지중해 길, 광야 박물관이 있는 미알레(Mialet)에서 시작해서 디(Die)까지의 세베느 길, 왈도파 학살 장소였던 메린돌(Mérindol)에서 시작해서 샤띠엉 디와(Châtillon-en-Diois)까지의 루베홍 길, 그리고 내가 사는 그르노블에서 남쪽으로 차로 2시간 떨어진 르뽀엣 라발(Le Poët-Laval)에서 시작해서 제네바까지의 가장 전통적인 길이다. 이 길은 제네바에서 바르츠하임(Barzheim)까지의 스위스 구간(579km)을 통해 독일 바드칼슈판(Bad Karlshafen)까지 총 1,600km에 이른다.
프랑스 세 구간 모두는 내가 걸었던 전통적인 길과 만난다. 그리고 이 길의 기착지 역할을 한 도시가 그르노블이다. 16세기 초 그르노블은 5천 명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 거주를 허락한 위그노 지도자 레디귀에흐(Lesdiguières) 이후 2만 명으로 성장한다. 당시 그르노블 주교 르 꺄뮈 추기경은 강압적인 수단이 개신교를 개종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님을 알고, 용기병들(Dragonnades)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네바와 독일로 향하는 모든 망명자들에게 그르노블은 환대의 도시였다.
선교지에 있다 보면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불쑥 찾아온다. 현재에 관한 질문이자 미래를 위해 답해야 하는 질문들이다. 순간 “위그노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이정표를 발견하고 나서 이 길을 걸었다. 그리고 환대의 도시였던 그르노블에서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떠나보내는 나의 사역이 환대와 섬김임을 다시 깨달았다. 3박 4일간 하루 네 구간씩 평균 100km씩 걸었던 과정 중에 한 구간(르뽀엣라발에서 디까지)만 여기 소개하려고 한다.
망명길의 시작점은 르뽀엣라발이다. 옛 오래된 마을에 있는 예배당은 낭트칙령 철회로 시작된 예배당 파괴를 피해갔다. 바로 옆에 도피네 박물관에서 위그노 역사를 관람하고, 도피네(당시 이 지역을 부르는 옛 명칭) 기독교 중심지였던 Dieulefit을 향해 걷다 보면 옆으로 라벤다 밭들이 보인다. 바로 산길을 오르면 Comps라는 마을에 성 안드레 성(Le château de Saint-André)이 나온다. 이 성은 위그노 전쟁 당시 지휘관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더 거슬러 가면 1561년 9월 깔뱅이 헝가리산 크리스털 잔으로 성찬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Bourdeaux로 내려가면서 위그노 무덤을 만났다. 루이 14세는 성스러운 땅에 이교도나 다름없는 개신교인들을 매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신성한 프랑스 땅에 이신칭의를 고백하는 개신교인이 편안히 묻힐 땅은 없었다. 이때부터 위그노들의 무덤은 무명의 장소나 산속, 그리고 가족들만 아는 숨겨진 장소로 옮겨졌다. 이 마을에는 용기병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Le combat des Bourelles)와 보르도 개혁교회 목사이자 역사가, 판사, 작가인 Alexis Muston가 섬겼던 개혁교회도 볼 수 있다.
망명길에서 만나는 첫 번째 고개인 Chaudiere(1,047m) 산장 주변으로 10명의 사람만이 살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루를 묵은 후에, 동이 트기 전에 맞은편 고개 위에 있는 Rimon(1,000m)이라는 마을로 올랐다. 자유를 위한 길이었지만 쉽지 않은 길에 동행했을 아이들, 여자들, 가족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또한 함께하기 어려워 홀로 걸어갔던 사람들의 애환과 슬픔도 느껴졌다. 신앙의 자유가 뭐란 말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신앙의 모든 여정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하고 약속으로 견디며 감사와 진정한 경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고개 정상에서 첫 구간 종착지 디(Die)가 내려다보인다. 도시 옆을 지나는 드롬 강가에는 여름 피서객들의 물놀이가 보인다. 망명길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쉼과 휴식을 그려보았다. Die는 작은 제네바로 불렸다. 기독교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개신교가 부흥했는데 17세기 초 출생 기록에서 가톨릭 신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학교는 낭트칙령 폐지로 폐교되었다. 시내 사거리에 있는 집 문 위에는 “Tamen rupes mea est Deus, non movebor”(Cependant Dieu est mon rocher, je ne serai pas ébranlé: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는 결코 요동치 않으리라, 시편 62:2)이라는 라틴어 글귀가 있다. 불가타 성경과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개신교의 고백임을 보여 준다. 신앙의 박해와 자유 사이에서 이 글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격려했고, 지금 나에게도 위로와 힘을 준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경배하고, 섬기기 위한 피난, 망명의 길이 지속된 이유다.
이후 제네바까지의 여정은 블로그(http://blog.naver.com/grenoble_bonfruit)에 사진과 함께 올려놓았다. 프랑스 국경 도시 Frangy에서 스위스 국경 도시 Chancy를 넘을 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네바에 도착해 종교개혁 동상 앞에서 개혁자들과 대화하면서 ‘아, 이제 신앙의 자유를 얻는구나! 마음껏 예배하며 찬송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즈음에, 양산에서 온 청년들의 찬양 소리가 들렸다. 인사를 나누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축복송을 불러 주었다.
긴 여정을 끝낸 나그네를 축복하는, 이름도 모르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신앙의 여정이 끝나는 날 주님께서 맞아주실 복된 은혜를 새기며 돌아왔다. 길은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 걷는 사람마다 다양한 이유와 사정에 맞게 맞춤형 묵상과 답을 제시해 주는데 나에게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