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57] 사선에 선 목회자: 불꽃처럼 타오른 파렐_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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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57

사선에 선 목회자: 불꽃처럼 타오른 파렐

 

[파렐, Bèze의 Icones(1580)]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복음이 불타오르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바라랴?”라고 외칠 정도로 복음에 불꽃 같은 열정을 품은 사람이었 다. 남동 프랑스의 가프(Gap)에서 출생한 파렐은 파리에서 고전어와 철학에 뛰어난 기량을 보여 대학자 르페브르 데따 쁠의 주선으로 ‘추기경 르무완 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었다. 가톨릭에 헌신적이었지 만, 성경을 연구하면서 회의를 품고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521년, 파렐은 브리소네 주교가 데따쁠의 제자들과 함께 성경과 인문학을 연구하려고 만든 ‘모 (Meaux) 동아리’에 몸을 실었다. 모임이 소르본의 이단 시비로 폐지되자 그는 도피 길에 올라 여러 도시를 다니며 동년배 개혁자들과 깊은 연계를 맺었다.

이후 파렐은 프랑스 접경인 스위스 동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몽벨리아르에서 가톨릭의 우상 행렬을 보고는 성 엉뚜 완느의 초상화를 집어 던지는 바람에 활동이 중지되었다. 1525년 9월, 스트라스 부르로 이동한 파렐은 프랑스 난민 목회를 하다가, 1526년부터 1531년까지 여러 도시에서 개혁파 신앙을 전파하였다. 파렐의 설교는 천둥 치듯이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설교로 청중이 알아듣기 쉬운 덕분에 강한 감동을 일으켰다. 뇌샤텔은 길거리 전도를 시작한 파렐의 노력에 힘입어 1530년 10월 23일에 마침내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1536년 11월 1 일에 종교개혁을 성취한 로잔에서는 삐에르 비레(Pierre Viret, 1510-1571)가 1558년까지 목회를 했다.

1532년 9월 12일, 파렐은 왈도파를 영입하기 위해 알프스 삐에몽 계곡의 샹포 랑(Chanforan)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 하였다. 개혁파와 합류한 왈도파는 깔방의 육촌 로베르 올리베땅(Robert Olivétan)
에게 성경 번역을 맡겼다(1536년 출판).

같은 해, 파렐은 제네바에서 길거리 설교를 시작으로 차츰 대표적인 가톨릭 성당 들에서 개혁파 신앙을 가르쳤다. 1535년, 불만을 품은 가톨릭은 한 여성을 사주하여 음식에 독을 넣어 파렐을 살해하려고 꾀하였다. 파렐은 마침 식사 자리에 가지 못해 모면했지만, 대신 음식을 맛본 비레가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1536년 5월 21일, 제네바는 드디어 공식적으로 개혁파 예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파렐은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변화시켜 동역자를 세우는 인재 발굴의 대가였다.
1536년 늦여름, 얼마 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한 깔방은 연구를 계속 하러 스트라스부르에 가던 중에 제네바를 우회하면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파렐은 깔방을 찾아가 천둥 같은 소리로 제네바 개혁에 동참시켰 다. 두 사람은 도덕적 부패를 향해 강한 권징을 행사하는 바람에 1538년에 추방을 당했다. 깔방은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프랑스 난민을 목회하고, 파렐은 뇌샤텔의 청빙을 받았다. 1541년, 깔방은 파렐의 설득을 못 이겨 제네바에 귀환하여 종교개혁을 완수하였다. 파렐은 1543년 2 월 1일부터 뇌샤텔 목회자 회의를 결성하여 목요일마다 목회를 논의하였다.
1542년 9월 3일, 파렐이 알자스-로렌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확보한 메츠(Metz) 는 1543년 3월 25일에 기즈(Guise) 공작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하였고, 파렐은 부활 주일에 격려하러 갔다가 심한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1553년 11월 15일, 그는 제네바에서 청년들의 공격을 받은 후심한 중병에 걸려 유언을 남길 정도로 위험했지만, 신기하게 회복되었다. 1558년 가을, 파렐은 69세의 나이에 뇌샤텔 피신

해 있던 열여덟 살의 여성과 결혼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깔방을 비롯한 동료들은 심한 나이 차이로 비방을 받을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후 파렐은 거침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프랑스 난민을 환대한 독일 나쏘(Nassau)를 방문하고(1559), 왈도 파를 지원하러 프랑스 남부를 방문하는 중에 고향 가프와 그르노블에 교회를 설립하였다(1561).

1564년 5월 27일, 파렐은 깔방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복음을 확산하려는 굉장한 열정으로 불탔던”(깔방의 시편 주석 서문) 파렐은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메츠에 설교를 하러 다녀온 후에 병상에 누워 넉 달 만인 1565년 9월 13 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뇌샤텔에 파렐의 동상이 서 있고, 파렐이 활동 했던 여러 도시에 그를 기리는 길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