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인물: 적십자 창설인 뒤낭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앙리 뒤낭(Henri Dunant)은 1828년 5 월 8일에 제네바에서 개혁파 신앙을 따르는 부모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네 바는 신앙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 는데, 깔방의 신학에 충실했던 그의 부모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사회사업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아와 출소자를 헌신적으로 돌보았 고, 어머니는 가난한 병자를 돕는 데 힘을 기울였다. 부모의 영향으로 뒤낭은 18세가 되자 제네바 자선 협회에 가입하였고 이듬해부터는 성경공부 모임을 주도하고 빈민을 구호하며 교도소를 방문하는 일들에 앞장섰다. 학업이 뒷전이다 보니 뒤낭은 대학을 제대로 마칠 수가 없어 21살에 은행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YMCA 운동에 참여하여 견습생으로 받은 자신의 봉급까지 내놓는 등 열정적으로 활약하였다.
1853년, 뒤낭은 은행의 파견으로 북아 프리카의 스위스 식민지를 방문하였다. 거기에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토지를 받았다.
1856년, 그는 알제리에 곡물 무역회사를 창업하였는데 식민지 관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제분기를 돌리는 데 필요한 수력을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자 뒤낭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다음에 직접 황제 나폴레옹 3 세를 만나러 갔다. 1859년이었다. 마침 황제는 전장에 출정한 상태였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자주권을 추구하는 에마누엘레 2세의 사르디니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사르디니아와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1859년 6월 24일, 오스트리아와 겨루는 솔페리노(Solferino) 전투에서 사르디니아와 프랑스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가공할 만한 격전 끝에 4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널브러졌다. 뒤낭은 솔페 리노 전투가 남긴 참상을 목격하면서 인생의 경로를 바꾸었다. 그는 카스틸리오네 (Castiglione)에 기지를 두고 여성 자원 자로 이루어진 야전 구호소를 세웠다. 특히 치에사 마기오레(Chiesa Maggiore) 에 설치한 치료소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자그마치 만 명이 넘는 군인들을 돌보았 다. 심지어 프랑스 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군의들을 석방시켜 부상자들을 치료하게 했다. 다음 달,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전장 참상을 책으로 쓰기로 마음먹고, 1862년에 자비로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érino)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뒤낭은 이 책에서 장차 창립될 ‘적십자’ 의 중요한 지침을 제시하였다. 다름 아니 라, 부상병을 도울 구호 의료진을 확립하 고, 모든 구호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시행 하며,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 중립성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유럽의 정치와 군사에서 여러 지도급 인사들에게 보내주었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사업을 구체화하기 위해 ‘5인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뒤낭을 비롯하여 당시 ‘제네바 공공복지 협회’ 회장이었던 무와 니에(Gustave Moynier), 스위스 군사령 관, 그리고 2명의 의사가 자리를 잡았고.
1863년 2월 17일, 마침내 ‘국제 적십자 협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구호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뒤낭과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무와니에 사이에는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빚어졌다. 1864년 8월 22일, 제1차 제네바 회의에서 12개 국가가 협약에 서명하 였고 백색 바탕에 적색 십자가를 그린 로고를 도입하였다.
한편, 뒤낭의 알제리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파산하기에 이르렀다(1867년 4 월). 이 때문에 뒤낭은 적십자의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YMCA에서도 오명을 남길 수 있다는 이유로 축출되었으 며, 결국 고향인 제네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뒤낭은 파리로 이주하여 경제 적으로 아주 열악한 조건 가운데 살면서도 끊임없이 인도주의적 착상과 계획을 전개하였다. 1901년, 뒤낭은 프랑스인 평화 주의자 빠쒸(Frédéric Passy)와 함께 공동으로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뒤낭을 치하하는 말은 이렇다. “귀하 외에 달리 이영예를 받을만한 사람은 없다. 귀하는 어언 40년 전 전장에 쓰러진 부상병들을 돕는 국제 구호기관을 설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귀하가 아니었더라면 19세기의 가장 고귀한 인도주의 업적인 ‘적십자’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1910년 10월 30 일, 뒤낭은 82세를 일기로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네바에 뒤낭을 기리는 길, 흉상, 조형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