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열의 시대에 나누는세 가지 정치적 제안
이정우 목사_경기북노회 은혜의숲교회
비상계엄령과 탄핵정국, 그리고 대통령 선거, 그야말로 이 땅은 몸살이다. 보수의 이념과 진보의 프레임에 가뜩이나 작은 몸이 반쪽 날 지경이다. 이 싸움에 등 터지는 몸이또 있으니, 교회가 아닌가 싶다. 특정 이념에 경도된 어떤 목사들은 세상으로 교회를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교우들에게 자코뱅과 지롱드의 깃발을 들리고, 이념의 총알받이로 내몰기도 한다. “인간의 집단적 이기심이 종교적 열정으로 위장될 때가장 위험하다”라고 했던 라인홀트 니버의말 때문일까. 조국교회가 영 위태위태하다.
정의에 피 끓던 시절, 백면서생으로는 살지 않겠노라 뛰쳐나가 살 때, 주께서 타이르셨 다. “나는 네가 세상을 심판하기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인생이길 원한다.” 이후내 정치적 열정은 십자가에서 발출된 사랑으로 세상을 품는 것이 됐다. 물론 어설픈 ‘정교 분리’나 폴 스티븐스가 경계한 “성속이원론이 라는 가장 심각한 이단”의 길일 수는 없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개념이 그러하 듯,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은 나의 정치적 영역에도 선포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평소에 자문하는 세 가지 질문을 제안 삼아 나누고 싶다.
첫째 물음은 “우리의 소속은 어디인가?”
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 다”(요 18:36)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이 선 언은, 내 모든 정치적 항해의 등댓불이다. 칼뱅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세속 정부의 그것과 엄히 구분했다(Inst., IV.20). 어거스틴은 『하 나님의 도성』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초월적 가치에 근거함을 분명히 했다. 명확히 해 둘 게있다. 우리의 소속은 “아들의 나라”이다(골 1:13). 그 아들처럼, 그러므로 우리의 정치적 선언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 데서 나온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둘째 물음은 “우리의 정치적 소명은 무엇인 가?”이다. 목회는 성경 Text(본문)를 역사적 Context(정황)에 심는 것을 소명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는 맥락 속에서 해석되 지만, 동시에 맥락을 초월한다”라고 한 리쾨르의 말은 의미가 있다. 텍스트를 시대의 맥락에 담아내는 일로서의 정치적 소명은 초월적 본질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 의 정의는 세속의 어느 한 편을 위해 펄럭이는 깃발일 수 없다. 정치 이념에 복음을 끼워 맞추지 말고, 오히려 복음으로 현실을 비춰야 한다. 정치적 소명을 하나님 나라의 현현으로 보는 개혁주의의 전통과, 칼뱅의 제네바와 카이 퍼의 암스테르담을 기억하면 좋겠다.
셋째 질문은 “우리의 정치적 전략은 무엇인 가?”이다.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 24:6). 세 가지 전략을 생각한다. 보편적 원칙을 선포하고, 약자의 편을 우선하며, 겸손한 예언자의 언어를 갖자는 것이다. 스프롤은 『교회와 국가는 어떤 관계인가?』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일례로, 교회가 특정 정책을 지지하기보다 ‘생명의 신성성’이라는 보편적 원칙을 선포하자고 했다. 카이퍼 역시 특정 정당의 정책보다 보편적 윤리를 권면했다. 월터스토프와 플랜팅 가는 ‘공정’ 개념을 재정의하며, 특히 “약자의 권리 보호”(잠 31:8-9)에 기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의 정의는 고아와 과부에게 우선하기 때문이다(신 10:18). 또한 교회의 정치적 소명은 예언자적이다. 예언자의 목소 리는 거칠기 쉽다. 그러나 겸손한 언어가 더유용하다. 워필드는 인종차별에 맞서면서 ‘자기 의의 포로’(롬 10:3)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카이퍼는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 단 한치의 땅도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외치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작금의 어떤 교회의 정치적 행보는 이념으로 선교의 현장을 절반으로 갈라놓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돌다리를 두드리듯 걸어야 한다. 십자가는 어느 한쪽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사랑과 화해의 능력 이다. 먼저 정치적 소속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 소명이 무엇인 지, 그 소명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 말씀 으로 성찰하며, 주께 더 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