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54)] 빛나는 인물: 노예 해방 주창자 조꾸르_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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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인물: 노예 해방 주창자 조꾸르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18세기 프랑스 백과사전에 가장 많은 글을 기고한 대학자 루이 드 조꾸르(Louis de Jaucourt, 1704-1779)는 샹파뉴와 부르고뉴 귀족 가문 출신으로 1704년 9월 27일 파리에서 출생했다. 이미 16세기 중엽에 위그노 운동에 가담한 이 가문은 낭뜨 철회 당시 외면적으로는 가톨릭으로 돌아갔지만, 파리에 주재하는 스칸디나비아 대사관들에서 열리는 개혁파 예배에 비밀리에 참석하였다. 1720년, 젊은 위그노 조꾸르는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제네바에서 개혁파 신학을 공부한 데 이어 케임브리지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을, 화란 레이던에서는 의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다섯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헬라어와 라틴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비롯해서 역사, 정치, 철학, 신학, 물리학, 수학, 화학, 식물학, 인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비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꾸르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학자의 일생을 살았다. 후일 그의 종손자 프랑수와 조꾸르(François Jaucourt)는 관용칙령(1787년) 이후 정치가로서 프랑스 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꾸르는 1728년, 여러 정간지에 논문을 싣는 것으로 저술가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해 조꾸르는 의학 사전 편찬에 착수했다. 20년의 노고를 들인 원고를 프랑스에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보내던 중에 불행하게도 선박이 좌초하는 바람에 모두 소실하고 말았다. 1734년에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전기를 펴냈는데, 여러 번 판을 거듭한 덕분에 베를린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764년). 이 외에도 런던 왕립 학술원, 스톡홀름 학술원, 보르도 학술원이 조꾸르를 회원으로 선정하였다.

1751년 9월, 조꾸르는 당시 방대한 프랑스 백과사전(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편찬을 책임진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의 요청을 받아 제2권부터 기고를 시작하여(1752년 1월 출판) 루소나 볼테르 같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어깨를 겨누면서 최대 다작의 저술가로 떠올랐다. 이 백과사전은 자그마치 본문 17권(1751-1766), 도감 11권(1762-1772), 부록 5권과 분석표 2권(1780)을 가진 방대한 작품이다. 146명의 기고자가 전체 71,818편의 기고문을 썼는데, 그 가운데 조꾸르는 4분의 1에 해당하는 17,266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편집 책임자인 디드로는 조꾸르에게 “백과사전의 노예”(l’esclave de l’Encyclopédie)라는 애정 어린 별명을 붙여주었다.

조꾸르는 정치, 사회, 종교, 인권, 과학 등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의 글에는 가톨릭 성직주의에 반대하는 기류가 흐른다. 또한 그는 미신과 점술을 지성의 오류로 여기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조꾸르는 노예제도와 노예무역 같은 민감한 주제에 서슴지 않고 손을 댔다. 모든 인간은 자유라는 기본권을 가지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상품화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흑인 노예무역을 인권과 자유에 거스르는 악한 행위로 간주하였다. 오래전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가 노예제도를 정죄한 적이 있지만 막 시작된 신교의 확장을 두려워한 가톨릭 세력에게 외면을 당했는데, 2백 년도 넘은 후 조꾸르가 다시 발동을 걸었고, 그 결과로 마침내 1848년 4월 27일에 파리 마린 호텔(Hôtel de la Marine)에서 노예제도 폐지가 공표되어 프랑스 식민지에서 25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었다.

조꾸르는 재물을 탐하는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넉넉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덕에 평생토록 원고료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사재를 털어 비서들을 고용하여 집필 작업에 힘을 쏟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무료로 의술을 베풀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조꾸르는 자기의 대저택까지 임대료 없이 빌려 쓰는 형식으로 동료 서적상에게 매각하였다. 1779년 2월 3일, 그는 이 집에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파리 12구에는 폭 12미터에 길이 125미터를 가진 거리가 1885년부터 루이 드 조꾸르를 기념하는 “조꾸르 길”(Rue Jaucourt)로 불리고 있다.

 

[사진_루이 드 조꾸르. 구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