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52] 빛나는 인물: 왕의 출판인 에스띠엔느_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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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인물: 왕의 출판인 에스띠엔느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특출한 언어학자이자 파리의 출판 인이었던 로베르 에스띠엔느(Robert Estienne/Stephanus, 1503-1559) 는 유명한 인문주의 인쇄업자였던 앙리 에스띠엔느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후에 어머니는 아버지 동역자 시몽 드꼴린느와 재혼하였다. 꼴린느는 앙리 에스띠엔느의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1526년에 상속받을 나이가 된 로베르 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근처에 다른 인쇄소를 설립하였다. 그 해에 로베르는 같은 길을 가는 출판인의 딸과 결혼하 였다. 1535년, 장인의 사후에 로베르는 두 인쇄소를 합병하여 사업을 키웠 다. 그의 중점사업은 고전어 문법, 고전문헌, 교부문헌, 사전 등을 출판하는 것이었다.

로베르 에스띠엔느의 출판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경이다. 그가 출판한 라틴어 성경, 히브리어 구약성 경, 헬라어 신약성경은 대부분 당시 출판물 가운데 압권이다. 에스띠엔느는 1528년에 먼저 라틴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당대에 가장 포괄적인 불가타 개정판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고대 판본 들을 사용해서 불가타를 개정했다고 주장했다. 이 성경은 불가타 본문을 여러 부분 변경한 까닭에 소르본느 신학 부의 검열 대상이 되었고, 이후 길고 지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쯤 로베르는 위그노 교회에 가담한 것처럼 보인다.

1532년. 에스띠엔느는 앞의 라틴어 판을 개정하면서 구약의 정경 외 문서 들을 외경이라고 명시하였고, 구약에서 기독론적 의미를 담은 구절들을 돋보이게 만들었으며, 신약에서는 사도행 전을 복음서와 바울 서신 사이에 위치 시켰다. 이후 여러 차례 라틴어 성경을 출판하다가 1545년에는 8절지를 두단으로 나눈 특이한 라틴어 성경을 출판하였다. 한 단에는 불가타를 인쇄하 였고, 다른 한 단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라틴어 번역을 “N”이라고 표기하여 인쇄하였다. 사실상 이것은 레오 유트가 주로 작업한 1543년 판 취리히 라틴어 성경이었다. 불가타에 새번역을 병기한 것은 가톨릭의 거센 비판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에스띠엔느는 인문학자 바따블의 주해를 본문에 편집해 넣으면서 자신이 수집한 개혁파 사상들을 흩뿌려놓았다.

에스띠엔느는 히브리어 성경을 두번 출판하였다(1539-1543년에 13권, 1544-1546년에 10권). 1539년은 라틴어와 히브리어 서체 때문에 “왕의 출판인”(imprimeur du roi)이라는 명예를 얻은 해이다. 이것도 가톨릭의 분노를 자아내는 원인이 되었지만, 친분이 있던 국왕 프랑수와 1세가 에스띠엔느를 보호해 주었다. 에스띠엔느는 왕권을 비호하는 문서를 인쇄해 주고, 프랑수와 1세는 왕립도서관에 출판물을 장서해 주는 관계였다. 프랑수와 1세의 통치시대를 “프랑스 활판 인쇄술의 황금 기”라고 부르는 것은 일부 에스띠엔느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1547년에 국왕이 사망하자 가톨릭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워 1550년에 인쇄 자료를 가지고 제네바로 도피하였다.

에스띠엔느는 1546년에 헬라어 신약 성경 초판을 발간하였고 1549년에 제2판을 인쇄하였는데, 화려한 서체를 사용한 두 성경은 서문의 첫 말을 따와 “오 미리피캄”(O mirificam)이라고 불린 다. 1550년, 국왕 앙리 2세에게 헌정한 까닭에 “왕정판”(editio regia)이라는 이름을 얻은 제3판은 판형에 큰 변화를 주었다. 2절지 크기에 바깥 여백에는 관련 구절과 장 구분 표시를 제공하 였고, 안쪽 여백에는 여러 사본들을 대조하여 다양한 읽기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비평 장치를 가진 최초의 성경으로 이후 오랜 동안 “공인 본문”으로 사용되었다. 에스띠엔느가 제네바로 도피한 후 1551년에 출판한 제4판은 본문에 최초로 절 구분을 표시했다는 획기 적인 특징을 가진다.

제네바에 정착한 에스띠엔느는 인쇄 소를 설립하여 소르본느의 검열에 대한 “답변”을 출간하였고, 프랑스어 성경을 인쇄하였으며, 기독교강요를 비롯하여 깔방의 책들을 많이 출판하였 다. 그는 1556년에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다. 에스띠엔느 사망 후 아들들이 가업을 이어갔다. 파리 8구를 비롯 하여 프랑스 여러 도시와 스위스 제네 바에 로베르 에스띠엔느를 기념하는 거리(rue Robert Estienne)가 있고, 파리 13구에는 에스띠엔느 가문을 기념 하여 1889년에 개교한 인쇄술 학교인 “에스띠엔느 학교”(École Estienn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