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51_ 빛나는 인물: ‘위그노 교황’모르내-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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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인물: ‘위그노 교황’모르내

조병수 박사

박학한 문인이자 용맹한 군인이었던 필립 뒤플레시-모르내(Philippe Duplessis-Mornay, 1549-1623)는 가톨릭 쪽에서 “위그노 교황”이라는 별명을 붙인 대표적인 정치 외교가였다.
가톨릭을 고수하는 아버지와 신교 성향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모르 내는 위그노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1559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위그노 신앙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모르내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567년 제2차 종교전쟁이 터지자 위그 노를 지지하는 루이 꽁데 왕자의 진영에 가담하였지만,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는 바람에 전장에서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

1571년, 모르내는 「가시적 교회」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일약 위그노 대변인으로 떠올랐고, 1572년에는 꼴리뉘 제독의 밀사로 네덜란드의 오라녜 빌럼 침묵공을 방문하는 사명을 맡았다. 같은해 자행된 바뗄레미 대학살 현장을 가톨릭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벗어난 모르내는 영국으로 피신을 떠났다. 이듬해 말 프랑스로 귀환하여 장차 국왕이 될 나바르 앙리 진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75년, 모르내는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앙리 기즈의 포로가 되었는데 뛰어난 여류 문인이었던 샬로떼 아발레스뜨(Charlotte Arbaleste, 1550-1606)가 몸값을 지불해주어 석방되었다. 두 사람은 얼마 후에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점차 나바르 앙리의 오른팔로 인정을 받은 모르내는 1576년에 자문과 대사가 되어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사절로 활약 했다.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모르내 부부는 유명한 영국 국교 신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1584년, 발루와 왕가의 알랑송-엉주 공이 사망하여 나바르 앙리가 왕좌의 가시권에 들어서자 모르내의 정치 활동은 절정에 도달하였고 가톨릭 에게서 “위그노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나바르 앙리와 함께 디에프 공성, 꾸뜨라 전투, 이브리 전투, 루앙 공성에 참전하였고, 마침내 영국의 엘리자 베뜨 여왕에게 사절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모르내는 보좌에 오른 앙앙리 4세가 1593년에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절망하여 거리를 두기 시작하 였다. 하지만 그는 앙리 4세가 위그노에게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낭뜨 칙령(1598년)을 초안할 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해에 그는 「구교의 성찬 제도와 실행과 교리에 관하여」라는 방대한 저술을 출판하여 가톨릭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낭뜨 칙령 이후 정치 에서 멀어진 모르내는 일찍이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던 소뮈르(Saumur)에 가서 신학교를 설립하여(1599년) 교육에 힘을 쏟으면서 위그노 운동의 부흥을 위해 일했다.

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르내는 엄청난 계획에 동참하였다. 이것은 당시 파리 교회를 목회하던 삐에르 뒤물랑 (Pierre Du Moulin) 목사가 추진한 국제 신교연맹 결성 계획이었다. 뒤물랑 목사는 가톨릭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를 강력한 후원자로 삼아 개혁파, 루터파, 영국국교를 연합시 키는 신교 연맹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때 오래 전부터 영국, 독일, 네덜란드의 정치계와 폭넓은 교분을 나누고 있던 모르내가 국제외교에 적합한 인물로 떠올랐다. 모르내는 1605년에는 독자를 잃고 1606년에는 부인을 여의는 연이은 슬픔 속에서도 십년 이상 국제 신교연 맹을 결성하기 위해 다방면의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개혁파와 루터파 사이에 극복하기 어려운 신학적 괴리는 물론이고, 1618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사건들로 말미암아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618년에 모르내는 도르트레히트 회의에 참석하는 프랑스 신교 대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지만 루이 13 세의 출국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참석할 수 없어 서면을 보내어 토의에 도움을 주었다. 1621년, 가톨릭에 저항하던 소뮈르가 왕군에게 함락되는 바람에 모르내는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자기 영지로 은퇴하여 사망하 였다. 그가 저술한 「회고록」(Mémoires, 1572-1589)은 사후에 출판되었고 이후에도 판을 거듭하여 인쇄되었다. 파리 4구에 모르내를 기념하는 “모르내 길”(Rue Mornay)이 있고, 소뮈르에는 “뒤플레시 모르내 길”(Rue Duplessis Mornay)과 그의 이름을 딴 “뒤플레시 모르내 고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