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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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칼뱅은 기독교강요 3권 2장에 들어서면서 믿음에 관하여 상세하게 진술한다. 그가 다양한 진술을 이어가기 전에 가장 먼저 내놓은 첫 마디는 믿음을 지식 (cognitio)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계속되는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믿음과 관련해서 감정을 매우 조심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연한 감동, 낭만적 느낌, 애절한 마음, 심리적 흥분, 불타는 격정 같은 것들은 심지어 경건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믿음을 설명할 수 있는 첫째 요소가 아니다. 믿음이 지식이라는 정의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이런 지식을 공급하는 분은 성령님이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믿음과 관련하여 체계적 지식을 형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다. 이 때문에 성경에도 많은 신앙고백이 제시된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분의 유일하심을 선언하는 율법적 진술, 그분의 인도하심을 묘사하는 역사적 진술, 그분의 뜻하심을 지시하는 예언적 진술,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적 진술로 나타난다. 신약 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 고백(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 성부와 성자에 대한 이중 고백(창조주와 중보자), 다양한 형태로 구성된 삼위일체 고백이 주류를 이루면서, 그 곁에 구원, 교회, 종말 같은 주제들에 대한 고백이 병행한다. 성경의 신앙고백이 모두 신앙을 지적 체계 아래 두려는 시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은 성경적 방식은 역사 속에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부터 신앙고백 형성은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믿음의 지적 체계를 갖추기 위해 정선된 신앙 고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많은 개혁자들이 신앙문답서를 작성하는 일에 큰 힘을 기울인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특히 개혁파 교회는 프랑스 신앙고백서(1559 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년), 벨기에 신앙고백서(1561년),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서(1563년), 도르트 신조(1618-1619년),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문답서(1643-1647년) 등을 차례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들은 개혁파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 문서들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을 체계적으로 잘 표명하고 있다.

우리 교단은 작년 10월 말에 세계 장로교회의 신앙원리이며 정치규범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출간하였다. 2017년 제102회 총회의 헌의에 따라 총회 신학연구위원회가 2024년 제109회 총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개정 번역안을 보고 하였고, 여기에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더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연인원 675명의 신학자와 목회자가 7년간 헌신한 결과물이다. 이 문서의 서문에는 세 가지 기도가 들어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다시 한국 장로교회를 신앙 원리에 따라 바르게 세우는 도구가 되고, 한국 장로교회의 모든 직원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만을 충성되게 섬기는 분들이 되며, 교회를 견고히 지켜내는 교리의 표준이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옛날 문서를 우려먹느냐는 식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것에 노골적으로 냉소를 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비아냥거림은 현재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짓 부정하려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식과 다를 바가 없다. 세계 도처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고대 유물 박물관이 많은 데는 다 까닭이 있다. 고대의 유물이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엄청나기 때문이 다. 인간의 고대 유물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서는 현대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겠는가? 우리의 문제는 새것이 없는 것보다 옛것을 버렸다는 데 있다. 전통과의 단절은 발전의 부재보다 더 큰 문제이다. 얼레에서 떨어진채 날아가는 연과 같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신앙문서들을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구시대의 산물로 여기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신앙의 균형 잡힌 체계를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래된 문서이지만 항상 가장 최신인 것처럼, 성경을 체계적으로 간추린 신앙문서 들도 항상 최신이다. “옛것 속에 새것이 숨어있고, 새것 속에 옛것이 펼쳐있다”는 아우구스 티누스의 말은 들어볼 만하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렘 6:16)고 주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