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기는 성탄 설교] 구주 탄생과 외양간 구유(눅 2:1-7)_박윤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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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탄생과 외양간 구유(눅 2:1-7)

박윤선 목사(합신 초대 총장, 1905-1988)

예수님께서 하필 외양간 구유에 탄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해마다 성탄을 축하한다. 우리는 이 행사에 있어서 해마다 더욱 잘하는 경향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구주 탄생은 너무도 기쁜 일이고 경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해 성탄 축하를 가장 뜻있게 축하하기 위하여 우리 본문의 한 토막 말씀을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그것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구유’란 말을 음미하려고 한다.

외양간은 양 같은 짐승을 수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여기 탄생하신 이유는 그가 양과 같이 속죄 제물로 하나님의 백성을 속죄해 주시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말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해내는 속전(贖錢)은 너무 귀하여 사람들 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시편 49:7-9에 말하기를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한 속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는 구약 시대 성전에 제물로 드린 양으로 예표되었다. 그밖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456번이나 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예언의 대상이었던 그가 이제 실물로 나타나셨다. 그는 이렇게 희생 제물로 오신 고난의 종이시다. 이사야 53:7-8에 말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이렇게 고난받으시는 속죄제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그가 ‘구유’에 탄생하신 사실의 의미요 우리에게는 큰 표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기억하고 속죄의 복음 전하는 것으로 성탄을 축하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의미심장한 축하이다.

예수님께서 외양간 구유에 탄생하심은 그의 지극한 겸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겸손이란 것은 말이나 태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활로 성립되는 것이다. 그는 저렇게 낮아지신 것이다. 그것은 짐승의 거처에까지 낮아지신 겸손이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신 사실에서 우리가 들여다 볼 큰 진리가 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아지신 사실이다. 이것은 저가 지극히 큰일을 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겸손은 빼앗기는 것 같으나 많이 믿게 하는 오묘한 덕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더 많이 고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로 향하여 흐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두 다 살리고도 남는 무한한 은혜가 있는 분이었으니, 그의 겸손은 형용할 수 없이 크다.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신 이는 인류 중에 하나도 없다. 예수님의 겸덕(謙德)을 배운 바울도 겸덕으로 얻어진 부요가 위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하였고(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하였고(딤전 1:15),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고도 하였다(고전 15:8). 그러나 그가 저렇게 겸손하였으므로 얼마나 부요해졌는가? 그가 말하기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하였다(고후 6:9-10).

인생은 겸손을 억지로 가질 것이 아니고 으레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인생은 죄인이고 참으로 낮은 자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는 실상 인생이 무엇임을 모르는 자이다. 인생은 헛되다. 시편 62:9에 말하기를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인생이 무엇인가? 성경에 또 말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하였다(벧전 1:24).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을 뿐이다. 전 12:13에 말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사람의 본분이란 말은 ‘콜 하아담’이란 히브리어의 번역이니, 직역하면 ‘인생의 전부’란 뜻이다. 곧 인생 가치의 전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인생의 가치를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인생 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거짓되다고 위의 시편 구절은 말한다. 알렉산더 대왕도 33세에 별세하고 말았으니 후세에 남긴 것이 무엇인가? 사자가 살았을 때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도 못하나 죽은 다음엔 아이들도 그 뼈를 가지고 논다. 우리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겸손해져야 한다. 억지로 겸손할 일이 아니고 으레 겸손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저렇게 외양간 구유에까지 낮아지셨거든 우리는 무엇인가? 이번 성탄 축하는 우리의 겸손의 자리를 한 번 깊이 내려잡는 깊은 회개로 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