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인물: 농업 혁신가 올리비에 드 세르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보통 프랑스 농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올리비에 드 세르(Olivier de Serres, 1539-1619)는 비바래 지방 베르그의 독실한 위그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이 사망했을 때 고작 일곱 살밖에 안 되었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개인 교사를 둘 정도로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았고 일찍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등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지식을 넓혔고 다양한 실례들을 명확하게 경험하였다. 1557년 프라델(Pradel)에서 여러 제분소를 구입한 데 이어 광활한 영지를 획득함으로써 열아홉 살에 “프라델 영주”가 되었다. 1559년 6월 11일, 마르그리뜨와 결혼하여 일곱 자녀를 낳았다.
드 세르가 집사로 섬기고 있던 베르그의 위그노 교회에는 목회자가 없었다. 1561년 신년 첫 주일 예배가 끝난 후에 베르그 교회는 그에게 제네바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신실한 목사를 찾아보라는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로 쟈끄 베똥 목사가 부인과 딸을 데리고 3월 15일에 도착하여 프라델에 머물게 되었다. 베똥 목사는 수학자이며 기술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드 세르는 베똥 목사의 가정이 거주할 집을 수리하는 등 여러 가지 비용을 책임졌다.
1562년 프랑스가 위그노와 가톨릭 사이의 종교전쟁에 휘말리자, 5월 2일 베르그의 행정관들은 가톨릭 사제들을 배척하고 가톨릭 성물, 기물, 장식물을 압류하여 드 세르에게 위탁하였다. 1567년 그는 가톨릭 성물을 몽뗄리마르의 금세공업자에게 팔았다. 1573년 3월 2일 드 세르는 가톨릭에게 도로 빼앗겼던 베르그 탈환에 참전하여 위그노 군대의 지휘관을 도와 군대가 진입하는 것을 협조하였다. 후일 위그노 시인 아그리빠 도비녜는 그의 “역사”(1616년)에서 이에 대하여 진술한다. 종교전쟁의 여파로 안전을 위해 잠시 프라델을 떠났던 드 세르는 1578년 8월 영구히 거주할 마음으로 가족을 거느리고 프라델로 돌아와서 40년을 살았다. 나중에 그의 프라델 성은 가톨릭 군대에게 공성을 당하였고, 그가 온갖 농작물을 실험했던 농장은 루이13세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명령으로 갈아엎어지고 말았다(1628년).
드 세르는 실제적인 경험을 충분히 보여줄 모델 농장을 만들었다. 그는 주택을 복구하고 토지를 정리하여 개량하였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다. 또한 곡물을 윤작하고, 포도원에 유황을 비료로 주며, 새로운 작물들을 다양하게 심는 혁신적인 농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사탕무우에서 설탕을 추출해낸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의 목적은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줌으로써 농부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수확하게 하고, 지주들에게는 토지를 유용하게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앙리 4세의 보호를 받던 동생 목사의 일로 잠시 파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이미 집필해두었던 농업에 관한 책의 일부를 출판할 기회를 얻었고, 1599년 2월 “벌레로부터 명주실 추출: 프라델 영주 올리비에 드 세르의 농업 극장의 견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결국 1600년 7월 1일, 그의 대표적 저서 “농업 극장”(Théâtre d’agriculture)이 방대한 분량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지니고 있던 영적 헌신이 돋보인다. 경작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땅을 사용해야 하는 의무와 분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1600년 9월 27일, 비바래로 돌아온 드 세르는 국왕 앙리 4세의 특별한 전갈을 받았다. 2만 그루의 뽕나무를 파리로 보내어 프랑스 왕국의 심장에 비단을 보급하라는 명령이었다. 농업에 관심을 가졌던 재상 쉴리가 그에게 뽕나무 재배와 누에 배양을 맡겨 비단 산업을 발전시킬 것을 천거했던 것이다. 게다가 쉴리는 견고함을 자랑하는 뽕나무가 군선과 전함을 만드는 재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본 사람이었다. 드 세르는 왕명에 따라 튈르리 정원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양식하였다. 혁신적 위그노 농업가인 올리비에 드 세르를 기념하는 길이 프랑스 여러 곳에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파리 15구에 있다(Rue Olivier de Ser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