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회의와 여호와의 회의
최덕수 목사(경기북노회 현산교회)
개인과 단체가 모여 사회를 이루면 반드시 회의라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것은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고 집단 지성이 도출해 낸 대안이 한 개인의 아이디어보다 낫기 때문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회의체(당회, 노회)가 교회를 이끄는 장로교회는 어느 교파보다 회의를 중시한다(제2치리서 7장).
교회가 회의를 하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삼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기로 하신 결정은 단독 결정이 아니라 “우리”라고 표현된 삼위 하나님 간에 나눈 대화의 결과였다(창 3:22-23). 삼위 하나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실 때 교제하고 대화하신다면 무지하고 연약한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교단과 교회들은 어떤가? 회의를 단지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여기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여지를 두지 않은 채 미리 작업해 놓은 밑그림을 따라 자기 뜻을 펼치려 드는 일은 없는가? 교회를 돌아보는 일에 힘쓰기보다 자기 뜻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교단 일에 깊이 관여하는 목사와 장로는 없는가?
회의에 참여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일꾼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와 교단의 방향과 정책, 그리고 실천 지침들을 자기 입맛과 선호도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회의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의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칠 뿐 하나님의 뜻이 들어설 여지는 없어진다. 이런 회의(會議)에 참여하면 깊은 회의(懷疑)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회의를 통해 장로정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먼저 회원의 마음에 진실이 자리를 잡아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거짓 진리를 지속적으로 내쫓아야 한다. 매 순간 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해야 할 말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진리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둘째로,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토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토론 없이 바꿀 수 있는 세상도 없다.”는 말이 있다. 토론이 교단과 교회를 바꿀 수는 없지만 토론 없이는 교회와 교단을 개혁할 수 없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잠 15:22). 예루살렘 공회는 물론, 도르트 회의, 웨스트민스터 총회 등 역사상 있었던 모든 교회 회의는 토론의 과정을 거쳐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셋째, 필요하다면 논쟁도 해야 한다. 다만 논쟁할 때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 진리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와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하더라도 다투지 말아야 한다(딤전 3:3). 느헤미야는 원수들이 계속해서 싸움을 걸어 올 때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진리의 성벽을 세우는 일에 매진하였다.
합신 교단이 처한 현 상황은 실로 엄중하다. 교단 내 적지 않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어느 때보다 머리를 맞대고 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을 도출하고 그것을 위해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미래를 직시하고 과감한 혁신을 단행해야 한다.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바로 잡기란 어렵다. 올바른 회의를 통해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란 합신의 3대 이념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회의에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자들처럼 참여해야 한다. 회의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장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과 진리에 더 가까운 의견이 개진되면 자기 의견을 내려놓고 그 의견에 동의해야 한다. 한 사람의 입김이 전체를 흔들지 못하도록 조율하고 연약한 이들을 배려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연말과 연초에는 특히 회의가 많아진다. 부디 올바른 회의를 통해 각 지교회와 합신 교단이 건강하게 세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