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38] 빛나는 인물: 끌레망 마로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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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인물: 끌레망 마로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위그노 역사의 배후에는 빛나는 인물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목회자와 신학자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신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큰 몫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위그노 운동은 단연 “평신도”가 주도한 운동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위그노의 초기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끌레망 마로(Clément Marot)이다(1496-1544). 프랑스에서 신교가 왕성하게 번져나가는 데는 특히 시편찬송의 영향이 지대했는데 시편찬송의 초판을 편찬한 인물이 바로 마로였다.

마로는 문필가였던 아버지 슬하에 남프랑스 까오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십 대 소년으로 파리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20대 초반에는 국왕 프랑수와 1세의 누이로 강력한 인문주의 옹호자인 마르그리뜨의 수행원이 되면서 국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1524년 마로는 국왕을 따라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였다. 국왕은 패전으로 포로가 되었지만 마로는 파리로 돌아와 마르그리뜨의 개혁을 지지하면서 자주 신교 모임에 들락거렸다. 그는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 때문에 소르본느 신학자들에게 이단으로 정죄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프랑수와 1세의 요청으로 방면 받은 마로는 궁정 계관시인이 되었다.

1530년에 결혼한 마로는 2년쯤 뒤에 자신의 작품전집을 출판하여 판을 거듭하는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마로는 가톨릭을 조목조목 거세게 비판하는 “벽보사건”(1534년)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 도피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네락에 있던 마르그리뜨에게 피신하였고, 이어 이탈리아 페라라로 가서 신교에 우호적이던 공작부인 르네 드 프랑스(Renée de France)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1536년, 신교 신앙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아 파리로 귀환하여 다시 궁정시인이 되었다. 마로는 당시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시편을 찬송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 개사하였다. 그의 시편은 심지어 궁정에서도 즐겨 불리는 인기를 얻었다.

같은 시기에 깔방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면서 부쩌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피난민(위그노)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의 독일인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접한 깔방이 마로를 만난 것은 이때였다. 이것이 1539년에 마로와 깔방이 함께 편찬한 첫 번째 시편찬송(Aulcuns pseaulms et cantiques mys en chant)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계기이다. 여기에는 마로가 개사한 열세 편의 시편(1, 2, 3, 15, 19, 32, 51, 103, 114, 115, 130, 137, 143편), 그리고 깔방이 개사한 여섯 편의 시편(25, 36, 46, 91, 113, 138편)과 십계명, 시므온의 노래, 사도신경이 운율화되어 들어있다. 22곡을 수록한 초판 시편찬송은 어른 손바닥 크기의 소책자(세로 15,5cm, 가로 11,5cm)로 63쪽으로 되어 있다.

시편찬송에는 기존하던 곡조들이 개작되거나 편곡되었다. 당시에는 이전의 작품을 개작하거나 편곡하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었다. 시편찬송에는 미사곡, 출처 미상의 민간 노래, 스트라스부르 독일교회에서 사용되던 곡조들이 활용되었다. 특히 독일인 작곡가들이 작곡한 곡들이 사용되었다. 시편찬송 초판은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도서관에 유일하게 한 권 남아있다.

소르본느로부터 이단 시비에 걸린 마로는 더 이상 국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네바로 피신하였다. 마로는 제네바에서 깔방과 함께 시편 작업을 하다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몽으로 떠나 토리노에서 사망하였다. 1544년, 마로가 사망한 이후 베자가 계속해서 시편을 개사하여 1551년부터 베자의 운율이 마로의 운율과 나란히 실리기 시작하였다.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마로와 깔방이 시작한 시편찬송은 1562년에 제네바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여기에는 마로의 운율 49편과 베자의 운율 101편이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