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의 변호
루이 14세는 자녀들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손자 루이 1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루이 15세가 겨우 다섯 살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쯤 고개를 들기 시작한 프랑스 계몽주의는 그의 재위 기간과 더불어 점차 무르익더니 통치를 마칠 시점에는 마침내 절정에 달하였다. 아직 위그노에 대한 종교적인 편견은 지속되었지만, 당시의 지성인들에게는 인간 이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법의 정신”을 남긴 몽테스키외, “철학 사전”으로 유명한 볼테르,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루소, “백과사전”을 편찬한 디드로 등이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인간의 존엄을 주창하는 계몽주의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1760년대에 들어서서 위그노와 관련하여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세 가지 사건이 연거푸 벌어졌다.
첫째는 깔라스(Jean Calas, 1698-1762) 사건이다. 깔라스는 뚤루즈 출신으로 포목상을 하던 신실한 위그노였다. 하지만 자녀들 가운데 한 명은 잔혹한 신교 탄압의 분위기에서 이미 가톨릭으로 전향한 상태였고, 장남 마르끄-엉뚜완느도 전향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위그노에게 진출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자 절망 가운데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1761년 10월 13일 저녁에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마르끄-엉뚜완느가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가족은 장남이 타살된 것으로 무마하려다가 결국 자살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깔라스가 가톨릭으로 전향하려는 아들을 죽인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그는 가혹한 고문을 받는 중에도 무죄를 주장했지만, 1762년 3월 10일, 끝내는 형틀에서 사지가 찢기고 화형으로 죽임을 당했다.
둘째는 들라바르(François-Jean de la Barre, 1745-1766) 사건이다. 그는 기사계급 출신의 청년이었다. 1765년 8월 5일, 북프랑스 아브빌 한 교각에 설치된 십자가상이 훼손된 것이 발견되어 독실한 가톨릭 지역주민들에게 분노를 자아냈다. 이에 대하여 아무런 것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평소 들라바르에게 감정이 좋지 않던 한 검사가 여러 증거를 긁어모아 그의 친구들에게 혐의를 씌었다. 혐의 가운데 중대하게 제기된 것 한 가지는 수난 주간에 성체 행렬이 지나갈 때 이 청년들이 모자를 벗는 예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불경한 노래를 부르고 성상에 침을 뱉거나 십자가상에 용변을 봤다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조사 중 들라바르의 침대에서 볼테르의 철학사전이 발견되어 1766년 7월 1일 그는 심한 고문을 받은 후 참수당하고 시신은 볼테르의 책과 함께 불태워졌다.
셋째는 시르방(Pierre-Paul Sirven, 1709-1777) 사건이다. 시르방은 남프랑스 가스트르의 공증인이었다. 그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21살의 둘째 엘리자베트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1760년 3월 6일이었다. 알고 보니 위그노 자녀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담누와르”(Dames Noires 흑의 여성들) 수녀회에서 데려간 것이었다. 치료의 명목 아래 더욱 정신이상을 일으킨 엘리자베뜨는 10월 9일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딸의 상태를 본 시르방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받은 담누와르는 도리어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딸을 학대했다는 고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1761년 12월 16일 엘리자베뜨가 다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듬해 1월 3일 우물에 빠져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딸을 죽인 혐의를 받은 시르방 부부에게 1월 20일 체포령이 떨어졌지만 적시에 스위스로 도피를 하였다. 1764년 3월 29일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9월 11일 그들의 모형을 불살랐다.
세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가진 볼테르는 예리한 문필로 당시의 종교적 편견을 매섭게 공격하였다. 그의 펜은 유럽 전역이 이 사건들에 눈길을 끌게 했고,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루이 15세까지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볼테르의 개입으로 깔라스와 시르방은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