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야기 공동체_이동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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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동체

이동열 교수
(합신 기독교교육학)

 

아동문학 작가인 폴 마르의 작품 『이야기하지 못하는 소년』에는 제목과 같이 이야기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소년 콘라드가 등장한다. 아이의 가족은 늘 함께 모여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데 소년은 이 이야기 공동체에 어울리지 못한다. 콘라드에게는 긴 호흡의 이야기를 한가로이 들을 여유가 없다. 눈앞의 모든 사물은 꿰뚫어 이해해야 할 ‘그것’이기에 그저 객관적 사실들을 냉정히 열거할 뿐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을 가슴이 없는 것이다.

콘라드는 오늘날의 교육을 받은 전형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세계를 분석과 조작의 대상으로 삼고 지배의 목적으로 배운다. ‘아는 것이 힘’이라 여기고 알수록 힘에 취해 교만에 빠져든다. 배움을 자극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며 모든 것들을 파헤쳐 설명하고 치워버리면 된다고 여긴다. ‘파악’(把握)된 사물은 이미 손으로 움켜쥔 것, 자신의 통제와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정 분야를 마스터(master)하고 나면 전문가로서의 학위를 받고 자격을 얻는다.

교육은 이처럼 ‘죽은’ 역사, ‘잘못하는’ 자연, 그리고 ‘그것’으로서의 사람에 관해 연구하고 사고하는 일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떤 시대를 낳았는가? 한병철은 그의 책 『사물의 소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좇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으로 달려가지만, 단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그저 내면에 매몰되어 버리고 만다.

교육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권위주의적 강의, 수동적 경청, 기계적 암기, 공동체를 파괴하는 분위기는 우리가 무엇을 가르치느냐와 상관없이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사물을 끝까지 꿰뚫어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설명하고 치워버려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공명하는 방법을 상실하여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신비와 경이를 잃어버려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C. S. 루이스는 『인간 폐지』에서 이러한 상태를 가슴 없이 머리만 남은 기괴한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루이스는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자아에 매몰된 갇힌 시각을 풀어 세상을 향해 마땅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 중 하나인 루시(Lucy)가 바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소년 콘라드와 대조적인 인물이다. 루시의 이름 ‘Lucy’는 라틴어 ‘lux’, 즉 빛에서 파생되었다. 루시는 세상을 경이로 가득 찬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본다. 형제 중 가장 먼저 나니아 세계에 발을 들였고 나니아 세계의 가장 많은 요정과 정령들을 보았으며 가장 마지막까지 나니아 세계를 경험하였다. 나니아 세계에 대해 루시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르치는 자들은 앎과 가르침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시대가 말하듯이 가르치는 자는 단순히 파악한 것들을 전달하는 자들이 아니며 유용한 기술을 습득시키는 자가 아니다. 가르침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인 ‘professor’는 원어적 의미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가르치는 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경이로운 세상을 어떻게 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까?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으로 세상이 지어졌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어떻게 말씀 천지인 이 세상을 보고 그 진리를 나누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루시가 그(아슬란)를 가장 자주 보았어.”(『새벽 출정호의 항해』 7장 중). 루시와 같이 경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공동체가 절실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