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따뜻한 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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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개혁주의”

‘따뜻한 개혁주의’는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형용모순인가? 우리 교단은 그동안 한국 교계에서 바른 신학을 표방하는 개혁주의 교단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우리 교단 목회자들은 비교적 작은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 올바른 신학과 말씀을 전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편협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개혁교회의 본질상 그런 비난의 일부는 어쩌면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장로교의 이상을 피상적인 구호를 넘어서서 현실에 접목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얼마나 했었는지는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 어느 신학적 입장보다도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목회 현장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거나, 사람들이 평가하는 가시적인 열매들로서는 부족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명예와 영광이 눈으로 보이는 결과나 어떤 숫자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향이 바르다면 주눅들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가진 소중한 개혁주의 신앙 전통과 자산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나가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성경적이고 바른 신학의 토대를 갖췄다는 점에서 우리가 나름의 감사함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이 여타 다른 교단들을 판단하고 얕잡아보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어야 하지, 자신의 자랑거리를 상대방과 견주어 평가할 일이 아니다(갈 6:4). 언약을 몸에 새겼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자부심이 변질되어 자만과 아집이 되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가졌으나 정작 말씀대로 사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좋은 신학 전통을 가졌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와 교만으로 비칠 뿐, 정작 바른 신학을 현실의 삶으로 드러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실력이 나의 실력 있음을 증명해 내지 못한다. 어쩌면 같은 연약함을 지녔음에도 비판적 촉각이 상대방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발달한 것은 아닌지 모른다. 바르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실력만큼이나 바른 신학과 신앙을 체화시키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때로 우리 교단이 다른 여느 대형 교단에 비해 교세가 약하고, 그래서 한국교회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 교단이 작지만은 않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서 합신의 의견을 비중 있게 다루고 관심을 가져온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우리 교단에 대한 존중과 기대를 갖고 있다.

기억할 것은 우리 교단의 역사도 이제 반세기 가깝게 지나왔고, 그동안 우리 교단을 이끌었던 스승과 어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합신을 태동하게 했던 한 세대는 가고 이제 그 배턴을 이어받아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는 상황을 맞았다. 과거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교단의 정체성에 맞는 미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과거에 머물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건설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과거 선배들이 땀 흘려 일궈왔던 개혁신학의 터전을 좀 더 발전시켜가야 한다.

우리는 정확한 현실 진단과 함께 우리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개혁신앙을 어떻게 지금의 시대와 조화시켜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엄밀한 개혁주의만 되뇌며 예리한 칼날로 ‘다름’을 날카롭게 잘라내면서 개혁주의 신앙을 ‘전가의 보도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개혁신학이 갖는 그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할 수 있는 대로 이 땅에 드러내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셔서 우리 주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는 일에 쓰임 받는 풍요롭고 따뜻한 개혁주의 교단을 함께 이루어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