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함께: 바씨 학살
뿌와씨 회담은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극명한 신학적 차이로 말미암아 화해를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위그노는 회담의 결과로 어느 정도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였다. 1562년 1월 17일, 모후 까뜨린느가 생제르맹 칙령을 발표하였는데(1월에 발표되어 “1월 칙령”이라는 별명을 가진다), 이 칙령은 위그노에게 도시 밖에 있는 비공식 장소에서는 예배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톨릭 쪽에서 보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칙령이었지만, 위그노들은 제한적으로라도 프랑스 전역의 곳곳에서 예배의 자유를 얻은 셈이 되었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230km 떨어진 곳에 바씨(Vassy, 현재는 Wassy)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당시 바씨는 샹빠뉴에 속한 작은 도시였고, 지금도 주민이 3천 명 정도가 살고 있는 도시이다.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을 둘러보거나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미루어볼 때, 바씨가 오래된 도시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씨라는 이름은 문서상으로 672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된다. 12세기부터 이 도시는 크게 발전해서 성채와 교회당을 건축하고 성곽을 쌓았다.
1562년 3월 1일, 바씨 성곽 바로 안쪽에 인접한 헛간에 위그노 50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천장이 높은 헛간은 발코니처럼 생긴 이층 구조였다. 아래층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층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앉았다. 틀림없이 그들은 목소리를 모아 힘차게 시편 찬송을 불렀을 것이다. 강단에서는 레오나르 모렐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제네바의 개혁파 교리를 따라 진행되었을 것이다. 예배처소 입구에는 큰 글자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합시다”라고 쓴 간판과 함께 연보함이 걸려있었다. 빈자(貧者) 구호는 위그노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헛간에서 위그노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마침 열렬한 가톨릭 추종자였던 프랑수와 기즈 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가족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영지인 로렌 샹빠뉴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귀족도 동행하고 있었다. 동생 로렌 추기경이 집례하는 미사에 참석한 기즈는 헛간 위그노 예배에 관한 소식을 듣자 귀족 한 명과 수하들을 보내 정황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문 앞에서 저지당했다. 기즈의 군인들과 위그노들 사이에 곧바로 시비가 벌어졌고,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은 기즈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헛간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팔수가 공격 나팔을 불자 무장한 군인들이 헛간으로 쳐들어가서 무방비 상태에 있는 위그노 신자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살육하기 시작하였다. 은혜로운 설교를 전하고 감격스런 찬송을 부르던 예배당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군인들은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칼로 내리치고 찔러댔다. 이층에 있는 사람들과 지붕을 뚫고 밖으로 도피하는 위그노들을 향해 마치 새나 토끼를 사냥하듯이 총을 쐈다. 기즈도 칼을 빼 들고 진입하였다. 이미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군인들을 뺄 수도 없었지만 빼려는 생각도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지속된 학살로 말미암아 50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고 140명이 부상을 입었다.
살육이 진행되는 중에도 모렐 목사는 임시로 제작한 강대상에서 설교를 계속하다가 총탄이 강단 주위로 날아다니자 허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모렐 목사는 다친 몸을 이끌고 도피를 시도하여 간신히 헛간 밖으로 나왔는데, 군인 중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는 칼로 내려치려고 했다. 그 순간 위로 쳐든 칼이 뚝 하고 부러지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체포된 모렐 목사는 인근 감옥에 갇혔다.
바씨 학살은 위그노들에게 거센 반감을 불러왔고, 위그노 편에 선 부르봉 왕가의 루이 꽁데 왕자가 한 달 후 오를레앙을 공략함으로써 40년 동안 지속될 여덟 번의 종교전쟁의 신호탄이 치솟았다. 제1차 종교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바씨 학살을 주도한 기즈 공은 암살당해 생을 마감하였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