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세계 교회사 23]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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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구속 언약’의 개념 이해

‘구속 언약’이란 창조 이전에 혹은 영원에서부터 사람의 구원과 특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관하여 삼위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이다. 17세기 언약신학자들은 구속 언약을 두 차원에서 이해했다. 첫째, 구속 언약은 시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을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삼중직을 수행하는 자격으로 언약에 참여한다. 둘째, 구속 언약은 초시간적으로 삼위 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언약인데, 특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언약의 당사자로 참여한다. 여기서 성부는 영원한 작정 가운데 성자를 선택하시고 성자의 구원 사역에 대한 보상으로 성자께 택자들을 약속하신다. 성자는 택자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과 십자가와 같은 특별한 사역을 수행하기로 자발적으로 동의하신다. 구속 언약은 영원부터 이미 확정되고 결론지어진 언약이다. 무엇보다 언약의 당사자가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구속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맺는 관계 역시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된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의 주체가 되신다. 또 다른 한편에서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위한 중보자와 보증인의 자격으로 언약에 참여하신다. 이 때문에 구속 언약은 ‘중보자 언약’ 혹은 ‘보증인 언약’(Covenant of Suretyship)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속 언약 교리와 개혁신학

칼 R, 트루먼이나 존 페스코에 따르면 구속 언약 교리가 처음으로 명백하게 언급된 것은 1638년 스코틀랜드 국교회 총회에서 데이비드 딕슨이 알미니안 신학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설에서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구속 언약이 조직신학적인 주제로 교리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구속 언약의 석의적인 토대는 이미 마련되었다. 리처드 A. 멀러는 이 사실을 훌륭하게 입증했다. 멀러, 트루먼, 그리고 페스코 등과 같은 현대 학자들은 구속 언약의 석의적 근거는 무엇인지, 구속 언약이 왜 은혜 언약의 영원한 기초가 되는지, 구속 언약 안에서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구속 언약이 예정과 칭의를 비롯한 성경의 여러 교리를 어떻게 연결하고 결합시키는지에 관해 논의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17세기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구속 언약이 신자의 경건을 위한 삶의 교리로 활용된 측면이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종종 생략된다는 점이다. 일례로 사무엘 루더포드는 구속 언약 교리의 성경적인 근거를 논증하기 직전에 신자의 ‘죄죽임’(mortification) 교리에 대해 긴 지면을 할애하여 논의한다. 이는 구속 언약 교리가 알미니안 신학이나 소키누스주의뿐만 아니라 율법 폐기론자들의 도전에 맞서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 그리고 성경적인 경건을 수호하는 유용한 교리로 활용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구속 언약 교리의 중요성

요컨대 구속 언약은 세 가지 차원에서 중요성이 있다. 첫째, 구속 언약은 언약적 통일성의 영원한 기초를 제공한다. 특히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 구속 언약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둘째, 구속 언약은 특히 은혜 언약의 기초가 된다. 은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작정과 의도가 명시적으로 발견되는 곳이 바로 구속 언약이기 때문이다. 택자의 구원이 사람 안에 근거를 갖지 않고 오히려 삼위 하나님 안에 근거하기에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에 안정성을 부여한다. 셋째, 구속 언약은 신자가 누리는 구원의 확신에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 구속 언약 안에서 모든 성도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속 언약에 따르면 각 신자는 영원부터 성부가 그리스도에게 약속한 택자들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도는 이들을 그분 자신의 양으로 이미 알고 계신다(딤후 2:19; 요 17장).

구속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신자가 경험하는 사랑과 은혜의 궁극적인 근원이 구속 언약에서 발견된다. 이런 맥락에서 루더포드는 이렇게 감탄한다. “아, 우리는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였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입히신 사랑에 비해 우리의 값어치는 얼마나 낮은가? 과연 사람이 하나님의 면류관이 된다거나,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걸고 달리며, 이들을 경쟁에서 승리하여 상으로 얻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과연 무로부터 지음받은 비천한 한 조각 안에 그토록 높으시고, 깊으시며, 광범하고 오랜 기간에 걸친 계획과 높으신 목표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겠는가? 우리의 이성은 다음과 같이 말할는지 모른다.  ‘가난한 자를 사는 데는 적은 돈이 들고, 죄인들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낮은 계획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랑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결코 더욱 적은 사랑으로 이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를 값 주고 사는 데 있어 이 사랑은 실수할 수 없는 사랑이다. 또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의 계획에 있어 이 무한하신 사랑은 결코 오류를 범할 수도 없는 것이다.”

◆ 1년 동안 안상혁 교수와 박상봉 교수가 교회사 관련 글을 기고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것으로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