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수상| “행복,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랑게요”_가정호 목사

0
358

“행복,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랑게요”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자살이라는 극단적 생각 속에서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돼”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 놀라운 결과가 주님을 섬겨온 열매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실상 어린 시절부터 간절히 기다려 왔던 일이었다. 행복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 아닌가? 수십 년을 몸부림쳐 온 결과 그렇게 원하던 행복을 이제야 느끼게 된 것이다.

계절이 조용히, 그러나 불현 듯 바뀌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하고 있는 자신과 가족들을 보게 된 것이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자신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는 큰 희열이었다. 온 식구가 함께 가난을 이겨왔기에 이제는 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고 그 결과, 거의 날마다 현관에 초인종이 울리고 택배 박스가 도착하게 되었다.

자신과 가족들이 그렇게 갖고 싶은 것과 만져보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을 보면서 흠칫 놀라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 연결되지 않는 가스펠 송이나 세상에서 얻어들은 가요를 흥얼거리는 자신의 모습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그는 이런 말도 심중에 중얼거린다. ‘내가 이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봤으니 어쩌면 이대로 죽어도 원이나 한이 없다!’ 가끔 아주 가끔 믿지 않는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할 때면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너무 행복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다며 간증이라는 것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이 반복되고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것도 지루해지고 재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문제가 시작 되었다. 어느 때부터 그 무엇도 갖고 싶거나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동시에 분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우울함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다일까? 이게 삶의 전부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어느 시점부터 무기력증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면서 과거에 조금씩 먹으며 지냈던 사케를 한잔씩 찾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믿음 생활하는 자식들의 눈치를 보면서 반주나 한잔씩 하던 그가 사케를 먹기 위해 왜식집을 드나들고 고급 부위의 마구로(참치) 회와 독한 술을 빈번하게 마시면서 심중에 혼자 중얼거린다.

이 정도는 다 이해해 줄 거야.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데… 주님도 목사님도 다 이해 하실꺼야…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에게 보상을 좀 해 주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러한 생각으로 서서히 빠져들어 갔다.

어느 날은 심한 우울함 속에 있을 때, 사케 하우스의 스탠드바의 동쪽방향 끝에서 자신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머리를 흔들며 아니지, 아니지 애써 외면하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 순간 그는 그 강렬한 시선에 사로잡히듯이 이끌리어 헤어나기 어려운 어둠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전에 행복하다고 느꼈던 그 감정은 이제 그 측은한 시선과 함께 함몰되어 아득히 사라지고 무섭고 두려운 일상이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책임질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그 측은한 시선을 이제는 책임져야 된다는 그 무게 때문에 삶은 무너지고 가족들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걱정하고 애통해면서 공황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전에 누렸던 행복이 거짓된 것임을 서서히 느껴간다. 교회는 멀어지고, 신앙은 흐려져만 간다.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SNS를 기웃거리며 혹시 해답이 어디 없을까를 찾게 된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말을 가끔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 못하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무(無)로 돌리는 것이 이 우울함과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어느 날부터 여기 저기 서점을 기웃거리게 된다. “자유죽음” 이라는 어떤 이의 책 소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살해라는 범죄적 죽음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그는 “장 아메리”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혹시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자유로운 허락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날 그 동안 기웃거려 왔던 페이스 북의 뉴스피드의 익숙한 인물들을 선택하여 여기 저기 넘나들다가 흠칫 놀라게 되는데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 이라는 책에서 그는 자살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페이스 북 페이지에 “자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에 자신을 가입시켜 놓고서는 한 번씩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곤 했다.

그곳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요상한 질문이 한 번씩 올라왔다가 곧 없어지곤 하는 모습이 마치 질문의 죽음과 부활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 질문이라는 것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 “혹 모월 모일에 같이 죽을 사람 없나요?” 이런 질문이었는데 운영자와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으면 모두 죽음을 연기라도 하는지, 또 포기를 하는 것인지 그가 던졌던 질문이 부끄럽다는 듯이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었고,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냐?” 하고는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내용을 보면서 오히려 행복은 인생의 참된 목적이 되어주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청년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생각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자신을 “없음”으로 소거시켜 버려야 하겠다는 삶과 죽음의 갈 짓자 심로에서 “자살&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오히려 새로운 삶의 방향을 깊이 있게 더듬어 알아가게 된 것이다.

자신을 죽여 이 세상에서 아주 없이하려 했는데, 파악 뛰어내리든, 아니면 퍼억 부딪혀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자꾸만 “무엇 무엇을 생각하는 모임”을 중얼거리며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과 실패 가운데서도, 행복과 불행 가운데서도 오직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 놀라운 사실이 가슴에 와 닿고 깨달아 지면서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