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류관의 무게
장홍태 선교사(GBT, SIL아시아 디렉터, 경북노회 새비전교회)
봉헌식 날 아침이 밝았다. 나의 갑순씨는 새벽녘부터 어디를 다녀오는지 방문을 여닫는 소리에 어슴푸레 잠이 깨었는데, 평소답지 않게 호들갑을 뜬다. “여보, 일어나 봐요!” 어둠이 짙게 내린 교회 맞은편 마당에서 청년들이 채소와 돼지, 그 녀석들을 구울 화목과 몽돌을 부지런히 옮기는 것을 보고 왔어도, 이 일이 과연 무사히 성사될까 마음을 졸이던 그녀였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자기가 아주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지난밤까지 다소 불안했던 마음 그대로 일찍 잠이 깬 탓에, 기도라도 하러 테라스로 나갔던 것일까? 새벽녘 하늘은 그 불안만큼이나 잔뜩 먹구름으로 덮였더란다. 그래서야 어디 선타니에서 성경을 싣고 올 비행기나 제대로 내려앉을 수 있을지, 기도 제목이 가슴에 하나 더 얹혔다. 하지만 그때, 바람이 일어나 먹구름이 밀려가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얼마나 쏜살같던지 그걸 동영상으로 담겠다고 휴대전화기를 가지러 다녀간 사이, 하늘은 금세 푸른 빛을 띠더란다. 들으면서 그 들뜬 마음이 내게로 옮아, 나도 덩달아 오늘에 관한 기대감이 더했다.
야자씨(Yajasi)에서 비행기 두 대로 온 봉헌식 손님과, 그 보다 하루 전 상용 트리가나(Trigana) 여객기로 온 사람들이 공항에 모였다. 두 대중 먼저 도착한 PC-12기의 기장 브래드(Brad McFarlane)는 우리보다 몇 년 전부터 파푸아에서 조종사 선교사로 섬기고 있으니 이곳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을 터, 그 노련한 솜씨로 착륙하자마자 비행기의 코를 파킹장으로 들이밀었다. 나중에 듣자니 오는 내내 이착륙을 제외하고는 비행기 조종간을 잡은 사람은 어진이었다니, 저 옛날 아들이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이리로 올 때면 조종간을 덥석 쥐여주곤 하던 폴(Paul Westlund) 생각이 절로 났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필시 왐본어 성경을 싣고 오는 이 역사적 비행에 파일럿으로 자처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이 우리에게 이바지한 것이 단지 성경 번역을 위해 오가는 우리의 날개가 되어 준 것만이 아니다. 아들에게는 비행의 꿈을 일깨웠고, 지금은 어엿하게 자격을 갖춘 조종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비행기가 도착하자, 성경과 손님을 맞이한 우리 부족민의 전통춤이 펼쳐졌다. 사실 이곳은 왐본 사람들의 고토가 아니다. 그들도 객으로 있는 이 땅에서, 그나마 왐본의 전통춤을 아는 사람들이 그들 고유의 복색으로 사냥과 전쟁을 앞둔 춤사위를 선보인 것은, 오늘만큼은 그들에게 당도한 말씀의 선물과 외지인을 그들의 공동체로 영접하는 환영의 몸짓이었다. 그 즐겁게 시끄러운 소리와 춤사위는 인쇄된 성경을 싣고 봉헌식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서도 계속되었다. 보펜디굴(Boven Digoel) 지방의 군 소재지인 이곳 따나메라(Tanah Merah)에는 족히 예닐곱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모여 사는데, 그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기는 왐본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랑삼아 트럭 위에서 춤을 춘다기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자연스레 시위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우리가 바라기에는,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왐본의 이웃들에게 자기들도 밝히 알아듣는 언어로 말씀을 갖기를 열망하는 시기심이 일어났으면 싶다. 여러 해 전, 갑순씨가 처음 나온 쪽복음을 들고 머라우께(Merauke)의 왐본 사람들을 찾아갔을 때, 우연히 거기에 함께 자리했던 어느 청년이 흐느끼며 했던 말이 그랬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복이 아직 없을까요?” 이 시위가 그들 속에 있는 그런 갈망의 불씨에 부채질이 되었으면 싶은 것이다.
이곳에 복음이 전해진 지 65년, 드로스트(M. K. Drost Ambonggo)라는 화란 개혁교단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날이 1958년 오늘이었다고 한다. 그를 통한 복음의 전파를 기리는 암봉고(Ambonggo) 기념교회에서, 오늘 우리는 그 65주년 감사예배와 왐본어 성경 봉헌식을 겸하기로 했다. 도착해보니 이미 성도가 운집한 예배당으로, 우리는 왐본어 성경을 들고 들어갔다.
65년 전 오늘, 선교사가 품고 왔던 복음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말로 된 것이 전부였다. 인도네시아 공용어 번역인 떠르즈마한 바루(Terjemahan Baru)도 1974년에야 초판이 나왔으니, 영어권 킹제임스 번역과 유사한 화란어 스타틴버르탈링(Statenvertaling) 버전이 선교사들의 성경이었던 셈이다. 선교사들이야 그것을 읽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었으랴만, 그것을 읽을 수 있는 파푸아 주민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그러니 파푸아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가 자기들 말로 읽고 풀이한 말씀이 거의 유일한 믿음의 밥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첫 선교사가 도착하고도 65년이 흘러 도착한 것은, 그들이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이 책을 소반에 담아 강대상 앞으로 가져갔다. 들기에는 겨우 700g 남짓한 이 성경의 진짜 무게는 얼마나 될까? 세상을 창조한 말씀이신 로고스(요 1:1)의 복음을 담았으니 그 영적 무게도 세상의 저울로 가늠할 수 없는 데다, 1900년 넘은 세월이 지나 첫 선교사가 도착하고도 다시 65년을 기다린 끝에 얻은, 이 지역 개혁교단의 첫 부족어 성경이라니 참 오랜 기다림의 결실이다. 그 기다림을 무게로 환산할 방법이 없으니, 그것은 일 개인이 아니라 어지간한 민족의 역사를 초월하여, 그 조바심으로 치면 하루가 천 년에 맞먹는(벧후 3:8) 우리 주님의 간절함을 무게로 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봉헌식 중간에, 사회를 맡은 우리 번역팀의 마띠우스(Matius) 형제는 대뜸, 왐본 주민을 대표해서 우리 가족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우리를 불러냈다. 우리로서는 처음 보는 뭔가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나의 목에 걸어주고, 또 아내에게는 모든 왐본의 여성들에게 있지만 척 보기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었음 직한 망태기를 걸어주었다. 어진이까지 불려나와 또 다른 장식 망태기를 선물로 받았다. “아니 제가 무슨 한 일이 있다고…” 목을 빼는 어진이나 우리나 마음은 매한가지,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사를 우리가 재단할 도리는 없다.
나중에 마띠우스에게 그 신기한 물건의 정체를 물었다. 그것의 이름은 “윤 마똔(Jun Maton)”이라고, 왐본 문화에서는 면류관에 버금가는 것이라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용사에게나, 자기들을 가족처럼 도와 어려움에서 구한 사람을 대접하는 존대의 표시라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무거워서 봉헌식 내내 목을 세우고 있기가 버겁더니만, 그 설명을 듣자 이미 걷어낸 후로도 그 무게가 벅찼다. 오죽하면, 이 밤 잠자리에 들면서는 계시록에 나오는 면류관을 벗는 장로들의 모습이 떠오를까? 혹시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께 드리는 이유가 ‘너무 무거워서’는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한 것은 없는데 우리에게 이런 영광이 돌아오는 것은 무척 곤혹스럽다.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할 때도, 우리는 기도 중에 한번은 이런 말씀을 들었다. “너희가 할 일은 없다. 여기에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를 지킬 필요가 있었을 뿐이고, 그분의 선교에 초대되었을 따름이다. 이름 하여 ‘바지사장’ 이라고 해야 할까? 위대한 그분의 일에 우리가 낀 것이 감사하다. 출석만으로도 면류관을 주시는 것이 고맙고, 그 영광의 무게 때문에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하시니 황송하다.
*2023년 8월 10일, 왐본어 창세기와 신약성경을 봉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