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섬진강으로_강승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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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으로

강승대 목사(합포교회)

 

‘심장이 아프다’는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는 혼자 일어났다. 결혼 생활 어느덧 30여년, 처음엔 남편만 바라만 보아도 설렘으로 심장이 뛸 때도 있었다지만 갱년기 때문인지, 가슴 쓸어넘기는 개척교회 25년의 굴곡 때문인지, 새가슴 같은 심장이 고장 나 조금만 힘에 부치는 일 겪으면 ‘심장이 아프다’는 얘기를 달고 산다. 성도와의 점심 약속에 도저히 심장이 아파 못가겠다는 아내를 두고 일어서는데 한마디 한다.

‘어디 바람쐬러 나가면 심장 뛰는 것이 진정될 것 같아요’
근방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며 대접하는 성도의 정성에 감사하나, 밥도 먹지 못하고 불규칙적으로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기다리고 있을 아내 생각에 음식 맛도 모른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 후에 아내에게 전화하니 이미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단다.

“어디로 가고 싶소?”
“ 아무 곳이나 그냥 가요.”

어디로 갈까? 오전에 내리던 겨울비가 그치고 날씨는 잔뜩 흐려있다. 목적지 없는 자동차 운전대를 잡은 내 마음이 복잡하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다. 오늘 저녁기도회와 청년부 성경공부 모임에 대한 불안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방안에 누워있는 것보다 바깥에 다니면 심장이 진정할 것 같다는 아내를 태우고 78km 정속주행하며 푸근한 첼로찬송을 틀고 말없이 달린다. 1시간 달리다 보니 섬진강 안내판이 나타났다. 갑자기 대학시절에 등반했던 불일폭포가 생각났다.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면 심장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방향을 잡았다. 하동 십리벚꽃길에 들어서니 흐렸던 날씨가 서서히 개이고 겨울햇살이 비치며 병풍같이 펼쳐진 지리산이 ‘확’ 눈앞에 다가온다. 산 능선의 실루엣이 장관이다. 땅을 덮고 있던 구름이 서서히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봉우리들마다 구름모자 하나씩 씌어주고 있었다. 바로 곁에 안개 속에 숨어있던 섬진강이 환하게 드러났다.

불일폭포 가는 길에 ‘최참판댁’ 간판이 보인다. 악양에 이르러 간판이 더 크게 눈에 들어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최참판댁’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하동군에서 소설 토지를 배경으로 조성해 놓은 평사리 ‘최참판댁’은 악양들판이 펼쳐지는 지리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는 너른 악양들판이 보이고, 들판 끝자락에는 섬진강이 굽이굽이 흐른다. 그 뒤에는 병풍처럼 지리산이 펼쳐져 있고 하늘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심장이 날뛰는 아내의 손을 잡고 노점상들을 기웃거리며 최참판댁에 들어갔다. 최참판댁 구석 구석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길상과 서희의 소설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서희아씨의 별당을 보고, 안채를 보고 사랑채를 둘러보고, 사랑채 정자마루에 앉아 너른 악양 들판과 섬진강의 붉은 노을을 우리는 한참 바라보았다.

최참판댁에서 내려오니 들판 한가운데 크게 만든 정월 대보름 달집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열댓마리 돼지를 잡아 정월 대보름 잔치를 시작하고 있었다. 드럼통 안에 숯불을 피워 구워내는 고기냄새가 악양들판에 진동했다. 연인같이 손잡고 가는 우리에게 비가 와서 사람이 없다며 기어코 먹고 가라는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마을잔치에 주저앉았다. 형님 같은 촌노들이 구워주는 고기를 우리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숯불구이뿐 아니라 수육까지 실컷 먹고 마지막으로 뜨끈뜨끈한 떡국 한 그릇까지 해치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내 등 뒤에 섬진강 노을이 저물어 간다. 밤이 되자 들판 여기저기 대보름에 태우는 달집들로 장관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위해 불을 놓아 환송하는 듯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섬진강 노을에 물든 악양들판에서 우리는 ‘토지’의 주인공 서희와 길상이 되었고, 우리들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섬진강 노을이 들어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분 좋게 웃는 아내의 심장은 벌써 정상이 되어 있었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라도 괜찮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섬진강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송림 사이로 걸으며 또 악양들판을 거닌다면 또다시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해 질 무렵에 찾아와서 섬진강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잊게 될 것이다. 만일 숯불고기까지 먹고 싶다면 하동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숯불고기 집을 찾아가면 된다. 시장 안에 있는 그 맛집에는 지금도 고기 먹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