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앙리4세
때로는 역사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앙리4세가 프랑스의 국왕이 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앙리는 왕위 계승과 다른 갈래에 속한 부르봉 가문이었다. 이런 방계를 통상 “혈연왕자”라고 불렀다. 그의 선대는 직계 발루와 가문에 속한 앙리2세로 왕후 까뜨린느에게 아들 네 명을 얻었다. 불행하게도 첫째 아들은 17살도 채우지 못한 채 병사하였고, 둘째 아들은 바르뗄레미 대학살의 후유증으로 미쳐서 죽었고, 셋째 아들은 피살을 당했고, 넷째 아들은 말라리아로 죽었다. 네 사람이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공이 옆으로 튀어 앙리4세에게 왕위가 넘어간 것이다. 역사에는 역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이 펼쳐진다.
앙리의 아버지는 나바르 왕국을 다스리던 엉뚜완느였는데, 한때는 위그노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결국 제1차 종교 전쟁에서 가톨릭 왕군 총사령관으로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1560년 성탄주일 예배에서 이미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인 앙리의 어머니 쟌느 달브레는 남편이 전사한 후에 나바르의 여왕이 되어 본격적으로 위그노의 정치적 수장으로 부상하였다. 달브레는 자신의 왕궁에 머물고 있던 떼오도르 베자에게 일곱 살배기 어린 아들 앙리를 맡겨 위그노의 신앙을 가르치게 하였다. 두 사람은 40년이 지난 후 우연찮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때의 일을 떠올리며 감회 어린 시간을 나누게 된다.
1572년, 앙리는 약관의 나이에 동갑내기 마르그리뜨(일명 “마고”)와 혼례를 올렸다. 이것은 가톨릭과 위그노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가톨릭 쪽에서는 국왕의 모후 까뜨린느의 딸 마르그리뜨가 신부로 나섰고, 위그노 쪽에서는 나바르 여왕 달브레의 아들 앙리가 신랑으로 나섰다. 혼례를 겨우 두 달 앞두고 달브레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불길한 조짐은 마침내 바르뗄레미 대학살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앙리의 혼인을 축하하러 파리에 대거 입성한 위그노 지도자들이 8월 23일에서 24일(바르뗄레미 축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 무차별 학살을 당하였다. 파리 전역은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던 앙리는 자신의 혼례를 축하하러 온 위그노 지도자들이 학살을 당하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앙리 자신도 국왕의 험악한 겁박을 받아 가톨릭으로 전향하기로 서약함으로써 겨우 죽음을 모면했지만 왕궁에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3년 반 후에 왕궁을 탈출한 앙리는 신교로 귀환하여 위그노의 수장으로 종교전쟁을 이끌었다(1576.2.5.). 당시 프랑스는 세 편으로 갈리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왕 앙리, 가톨릭 동맹을 대표하는 기즈 앙리, 위그노를 대표하는 나바르 앙리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 앙리의 싸움”에 뒤엉켜 있었다. 이 와중에 국왕 앙리는 기즈 앙리를 모살하였고 자신도 여덟 달 만에 피살되었다. 1589년에 나바르 앙리가 어부지리로 왕권을 차지하였다.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앙리는 파리를 거머쥐고 공포 정치를 휘두르는 가톨릭 동맹과 결판을 벌여야 했다. 거의 5년 동안이나 사투를 벌이던 앙리는 “파리는 미사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을 남기며 공식적으로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갔다(1593.7.25.).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라도 파리를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앙리의 변절이 어떤 속셈 때문인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추종자들에게 크나큰 실망과 극도의 분노를 안겨주었다. 가톨릭으로 귀의한 앙리는 반년 만에 샤르뜨르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파리에 입성하였다. 마침내 앙리는 프랑스 왕좌에 오른 것이다.
왕좌에 오른 앙리는 독실한 위그노였던 쉴리와 같은 출중한 신하의 도움을 받아 위그노에게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뜨 칙령을 발표하였다(1598.4.). 그러나 앙리는 가톨릭 여성 마리 드 메디시와 재혼함으로써 아들 루이13세를 가톨릭 신앙에 빼앗겨 위그노 역사에 다시금 큰 비극의 막이 오르고 말았다. 1610년, 앙리4세는 파리 한복판에서 가톨릭 열성분자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하였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