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논단] 찬송에서 음악의 역할_박동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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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에서 음악의 역할

박동근 목사(안양 한길교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찬송에서 음악이 하는 역할이 무엇일까?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들은 찬송에서 음악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히 곡조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음악은 찬송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신중이 채택되지 않으면 음악이 묵상과 고백을 훼방할 수도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찬송에 있어 음악을 반대하지 않았고 신중히 채택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찬송에 적절한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을 분별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신중함 속에서 회중이 함께 찬송에 참여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질서 안에서 찬송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중함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음악의 중요성도 인정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정서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몹시 큰 오해라 생각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정서를 억제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고, 우리의 정서가 참된 대상을 향해 있어야 하며, 정서가 무엇으로부터 뜨거워지느냐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이 부분에서 신중함이 결여된 찬송이 많이 불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식이 결여된 정서 자체의 자극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찬송의 본질인 진리에 있어 견고하였고, 음악의 적절하고 신중한 사용이 또한 존재했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칼빈의 찬송에 대한 이러한 균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도 중에 쓰여지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nisi ex alto cordis affectu profecta, unless they proceed from deep feeling in the heart)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 29:13-14; 마 15:8-9).(Inst. III. 20. 31.)
그러나 여기서 말과 노래를 배척하지 않는다. 도리어 마음의 감동(the feeling of the mind, animi affectum)과 관련된 것이면 극력 장려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깨어 있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 보조 수단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불안정하며 쉽게 변하며 해이하여져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신체 각부에서 어느 정도로 빛나야 하므로,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혀가 이 일을 하도록 맡겨진 것은 특히 합당하다. 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전하며 선포하도록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Inst. III. 20. 31.)

“그러나 혀는 주로 공중 기도에서(in orationibus publicis)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도는 신자들의 집회에서 하는 것이며, 이런 기도로 우리는 한 공통된 음성과, 이를테면 같은 입으로 모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 영과 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서로 그 교우에게서 신앙 고백을 받으며, 교우의 행위에서 권유와 고무를 받도록 한다.”(Inst. III. 20. 31.)

이러한 칼빈의 진술 속에서 칼빈에게 찬송은 신앙고백과 기도의 연장에 있다. 내용과 신학이 찬송의 생명이다. 그러나 칼빈은 음악의 본연의 역할도 인식한다. 칼빈은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다룬다. 교회는 오래 전부터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관습은 심히 오랜 것이다. 이 관습은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마찬가지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말한다. “시(hymnus)와 찬미(psalmus)와 신령한 노래(canticum spiritualis)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처음 구절에서 바울은 음성과 심령으로 노래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다음 구절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장려한다.(Inst. III. 20. 32.)“

그러나 어거스틴이 밀라노 교회는 암브로시우스 때에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관습이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밀라노 교회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모친 유스티나가 정통 신앙에 맹렬히 반대해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욱 끊임없이 기도에 전심할 때였다. 그 후에 서방 교회들은 밀라노 교회를 본받았다. 이는 조금 전에 어거스틴이 이 관습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는 또 저서 “재고론”(Retractations) 제 2권에서 말하기를, 아프리카에서는 한창 때에 이 관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호민관을 지낸 힐라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칼타고에서 최근에 시작한 이 관례의 노래는 성체를 들기 전 또 성체를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에, 성찬대 앞에서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교우들의 권고로 내가 그에게 답변했다.”(Inst. III. 20. 32.)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히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겠다는 진정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기보다 말하는 것같이 들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은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Inst. III. 20. 32.)

칼빈도 이와 같은 균형을 가지고 음악의 중요성과 그 신중한 선택을 권고한다. “우리는 찬송이 인간의 마음을 보다 열정적이고 열렬한 열의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찬양하도록 자극하고 일으키는 위대한 힘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함을 잃지 않는다. “그것(음악)이 우리의 유익과 행복에 이르기 위해 바쳐졌을 때 우리를 더럽게 하고 오염시키며 정죄에 이르게 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것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단지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 효력 있게 섬기도록 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도덕에 이르는 자유의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하며 우리 자신을 무질서한 쾌락으로 나약하게 하는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하며, 그리고 그것은 낭비와 어떤 방탕의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찬송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한다. 찬송은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구속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찬송이 세속적이고, 수평적인 것에 치우쳐 있는 경향도 농후하다. 그러나 에베소서 성도들에게 마음으로 찬송하며 교제하라고 교훈한 바울의 찬송 역시 하나님 중심적 찬송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교제한다. 그리고 노래한다. 찬송에 수직적 찬송, 수평적 찬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찬송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를 노래하는 것이 찬송이다.

교회와 성도들의 찬송이 진리의 말씀과 말씀의 교리를 잘 표현한 가사로 넘치길 바란다. 교회와 성도들의 찬송 안에 하나님과 구속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분명히 반영되어 지길 소망한다. 음악이 이 말씀과 진리에 반응하도록 돕는 유익한 수단으로 사용될지라도, 신중히 채택되고,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의 가사에 집중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 우리의 정서가 멜로디나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가사와 그것을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에 반응되어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찬송하는 기쁨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일들이 풍성해 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