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세계 교회사 5] 피렌 테제(Pirenne Thesis)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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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 테제(Pirenne Thesis)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1937년 파리에서 출간된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불어).

피렌 사후에 그의 제자와 아들에 의해 편집되어 출간되었다.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1935)은 그의 사후에 출판된 『마호메트와 샤를마뉴』,(Mohammed and Charlemagne, 1937)에서 서양 고대 세계의 종말과 중세 서유럽의 시작점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주후 476년 9월, 게르만족의 수장 오도아케르가 라벤나를 정복하고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킴으로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렸을 때, 고대는 종식을 고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례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1770-1788)에서 A.D. 476년을 서유럽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피렌은 이러한 상식을 깨뜨렸다. 고대 세계의 종말을 초래한 것은 게르만의 침입(4-6세기)이 아니라 7-8세기에 시작된 이슬람의 침공이었고, 서유럽의 중세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 피렌 테제의 핵심이다. 피렌 테제와 관련하여 흔히 “마호메트 없는 샤를마뉴 대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라는 표현이 널리 인용되어 오고 있다.

피렌이 이해한 고대 세계의 중심에는 지중해가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과 문물의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제적인 토대 위에 고대 문명은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피렌에 따르면 게르만의 대대적인 침공은 이러한 지중해의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게르만의 부족들은 그리스-로마의 문명과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오히려 고대 세계에 자발적으로 동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오도아케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킨 후, 스스로를 낮추어 파트리키우스(Patricius)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동로마 제국 황제를 섬겼다. 비록 아리우스파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정통 기독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게르만의 침입 후에도 보존되었던 지중해의 통일성은 7세기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고 피렌은 주장한다. 이슬람은 빠른 속도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동쪽 지역을 점령하고, 바다를 건너 스페인까지 진격하며 서유럽을 압박했다. 게르만족과 달리 이들은 기독교화된 로마 문명에 동화되지 않았다. A.D. 732년 투르-푸와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 카를 마르텔은 이슬람 군대를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중해의 지배권은 상당 부분 이슬람 세력에게 이미 넘어간 상태였다. 이후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A.D. 800년 12월,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 대제는 로마 교황에 의해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수여 받게 된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대가 공식화되었다. 이는 곧 서로마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 혹은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피렌에 따르면 이슬람의 침공이 초래한 이러한 변화는 포에니 전쟁 이후 유럽의 역사를 가장 극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중차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 전통은 끝나고 중세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피렌은 주장한다.

피렌 테제는 역사학계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비판자들은 피렌 테제가 부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지적해 왔다. 일례로 지중해 통일성이 파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슬람의 침공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었다든지, 이슬람 세력은 결코 지중해 무역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슬람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오히려 다방면에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슬람의 도래로 말미암아 동로마와 서로마가 서로 분리되기보다는 오히려 연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렌 테제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샤를마뉴와 마호메트를 대비시킨 피렌 테제가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권의 충돌이라는 주제와 관련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새롭게 주목받는다는 의견도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양이라는 큰 흐름을 정치적인 사건의 렌즈로만 바라볼 수 없고, 피렌이 강조한 경제적 토대뿐만 아니라 종교를 포함하는 문명의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 후속 연구들을 독려했다는 측면에서 피렌 테제가 학계에 의미 있게 공헌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교회사를 공부하는 연구자에게도 피렌 테제는 유익한 토론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초대와 중세 교회의 시기 구분과 관련하여 피렌 이후 세대의 연구자들은 정치-군사적 사건 이외에도, 사회-경제, 민족 집단, 로마 가톨릭과 프랑크 왕국의 연대, 동서 교회의 관계, 그리고 이슬람의 출현 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