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
고상섭 목사(그 사랑교회, 본보 논설위원)
알렉 모티어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면서 ‘의롭다’라고 이해되는 히브리어 ‘짜데카’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는 의미로 정의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자연스럽게 그렇지 못한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안타깝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이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올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이야기를 듣고 애통했듯이 하나님의 비전은 어떤 슬픔과 함께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그 복음의 은혜와 감격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 세상에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가 바르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다. 삶에서 세상을 향한,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애통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통치가 아직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셨다. 또한 죽음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보시면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다시 말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애통하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세상의 모든 무질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복음주의 교회는 개인구원에 집중하고,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사실 참된 복음은 반드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세상을 향하게 되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애통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의 마음에 나타나는 상태일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또한 그렇지 못한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그래서 그것이 사명이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슬픔을 동반한다.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는 내 안에 복음이 임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향한 슬픔과 아픔을 보고 애통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끝은 결국 분노와 데모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의감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도덕적 의를 창출하기도 하 고,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낙심과 분노 사이에서 널뛰기를 하다 지칠 때도 있다.
세상을 바르게 하고 싶은 정의감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내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는 모든 세상을 향한 구호와 비전들은 세속화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분노를 통해 일하지 않는다. 세상은 분노를 통해 변화되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사랑으로 변화된다. 내 안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무질서 속으로 들어가 인내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며 동참하는 것이다. 비록 이 땅 가운데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전히 변화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모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고 가리키는 나침반과 화살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속해 있는 곳에서 조금씩 그날을 기다리며 전진하며 땀 흘리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비전일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 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시작된다. 내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마른 상태에서 세상을 향한 정의감만 불타오를 때, 결국 올바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분노를 통해 건강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를 참된 애통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