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 위그노 태동의 전야 : 종교개혁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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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태동의 전야 : 종교개혁

중세의 끝자락은 지난 어느 때보다도 모든 면에서 훨씬 더 타락한 가톨릭의 모습으로 얼룩지었다. 가톨릭 사제들의 도덕적 해이와 문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에 달하였다. 본래 가톨릭은 사제의 결혼을 금하였지만, 사제들은 버젓이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낳아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취리히 종교개혁자 불링거가 가톨릭 사제였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사제직 자체가 말할 수 없이 타락하였다. 사제직 매매는 물론이고, 한 사제가 동시에 여러 직책을 보유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대표적으로 후에 위그노를 맹렬하게 공격했던 기즈 가문의 샤를르는 겨우 14살 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프랑스 랭스의 대주교가 되었고, 이어서 메츠의 주교와 로레인의 추기경, 그 외에 열 곳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가톨릭은 세속정치와 날카롭게 경쟁하는 중에도 그다지 낯붉힘이 없이 손을 맞잡았다. 이른 바 “면죄부”(면벌부)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재물 탐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톨릭과 세속정치가 민중의 피를 빨아 서로 나누어 제 몫을 챙기는 종교적 위장 수단이었다. 독일 남부의 은행가인 대재벌 푸거에게 돈을 빌려 쓴 신성로마제국의 칼5세와 마인츠 대주교는 이런 정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교황은 교황대로, 황제는 황제대로 각자의 금고에 재정을 충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특히 면죄부에 심각한 고민을 안고 혜성 같이 등장한 인물이 다름 아닌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탁발수도회 출신이었다. 그는 백 년 전 성경을 가지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보헤미야(체코) 프라하의 후스가 쓴 설교 사본을 들춰보고는 경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일 루터는 후스의 서신과 신학문서 일부를 독일어로 번역할 참이었다.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는 동안 점차 면죄부를 통한 가톨릭의 회개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마침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의 정문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을 내걸었다. 그는 첫째 조항에서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표명하였다. “회개하라”(마 4:17)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의 삶 전부가 회개의 삶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면죄부를 구입하면 형벌을 면한다는 가톨릭의 회개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루터의 도전은 독일의 북부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 전체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즉시 문서의 확산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은 덕분이다.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후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 때까지 45년 동안 유럽에 대략 2천만 권이나 되는 서적이 인쇄되었다니 가히 그 위력을 짐작하고도 남을만하다.

1519년부터 루터의 불씨는 프랑스에도 어김없이 날라들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루터의 저술들은 소르본느 신학자들이 금서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읽혀졌다. 파렐이 파리에서 이끈 작은 비밀집회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새로운 사상의 핵심은 이신칭의 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사실상 루터 이전에 이미 프랑스 인문주의자 데따쁠도 주장한 것이다. 1512년 그는 바울 서신을 주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만 획득된다는 사상을 펼쳤다.

그런데 일단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이 들어오자 프랑스에는 새로운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 발리에르가 공개적으로 루터의 사상과 신학을 설교하였고, 1523년 8월 8일 파리 한복판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루터의 정신은 젊은 학도들 가운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533년 꼽이 파리 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는 연설에서 루터의 사상을 언급한 것이 화근이 되어, 연설을 작성한 배후로 의혹을 받은 쟝 깔방은 파리를 탈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프랑스 신교를 “루터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