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주석과 개혁신학’_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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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정암신학강좌 요약 중계
주제 : ‘요한계시록, 현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지면 편집상 논문의 결론부분만 소개한다. – 편집자 주

 

변종길 교수(전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역임)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은 전체적으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해석 원리에 서서 건전한 해석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한국 교회 전반의 분위기와 자기 자신의 신앙적 경향의 영향을 받아 천년 왕국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천년기 전설)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 왕국에 대해서만 이런 견해를 분명히 취할 뿐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개혁주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다른 주석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그가 화란 개혁주의 주석가 쎄아클레 흐레이다너스(Seakle Greijdanus)의 견해를 많이 따르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은 전체적으로 볼 때 개혁주의 주석의 바탕 위에 자신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오직 정경의 권위만 인정하며 외경이나 위경이나 신화나 전설 등에 의지하여 해석하지 않고 “성경은 자기 자신의 해석자이다”는 개혁주의 해석 원리를 지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상징으로 보여 주신’(ejshvmanen, 계 1:1) 것이므로 대부분을 상징으로 해석하는 점에서도 둘 다 일치한다. 특히 숫자 3, 4, 7, 12의 상징성에 주목하며, 이에 기초하여 7의 절반인 ‘삼년 반’(혹은 삼일 반, 세 때 반)은 완전성의 파열 곧 불안, 고통, 환난의 때를 상징한다고 본 것이라든가, 12의 절반인 6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지 않은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말미암은 노력, 건설, 조직 등을 상징한다고 본 것 등은 흐레이다너스의 해석과 궤를 같이 하며 개혁주의적 해석의 특징을 보여 준다. 그 외에도 문자적 ‘7년 대환난’ 등을 믿지 않는 점에서 세대주의나 일반적 전천년설 입장과도 맥을 달리한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가 자신의 전천년설 입장을 지지하는 자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내세운 것은 조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카이퍼가 계시록 20장의 ‘천년 왕국’을 예수님의 재림 후로 본 것은 사실이며, 여기에는 계시록 19장과 20장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본 것에 기초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그는 분명히 전천년설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의 ‘천년’을 장구한 긴 기간으로 보지 아니하며, 매우 짧은 기간, 한 순간으로 보며, 이 세상의 시간 개념이 아니라고 보는 점에서 보통의 전천년설 입장과는 매우 다르다. 카이퍼는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 최후 심판은 연이어 일어나는 한 세트의 사건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는 무천년설(교회 시대 천년설) 입장과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카이퍼의 입장은 독특하며, 굳이 말하자면 전천년설적 무천년설, 혹은 무천년설적 전천년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의 입장은 카이퍼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신축성이 있는 과도기적 기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윤선 박사의 입장은 일반적인 역사적 전천년설과도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계시록 20장의 ‘천년 왕국’ 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와 많은 주석가들이 3절의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로 보고서 천년 왕국이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전천년설 주장자들의 치명적 약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가 계시록 20:4의 ‘살았다’에 대해 별다른 논의 없이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본 것도 아쉬운 점이다. 본문에는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순교자들의 ‘영혼들’(yucaiv)과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 ‘살았다’(e[zhsan)는 것에 대해 말한다. 곧, 순교자들과 성도들의 ‘영혼들’이 낙원에서 ‘생명’을 누림에 대해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계시록 14:13의 “지금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며, 요한복음 11:25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와 통하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헤르만 바빙크가 계시록의 이 구절에 대해, 영혼들이 ‘부활했다’거나 ‘일어났다’거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살았다’(leefden)고 말한다고 한 것은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펄도른 신학교 교수를 지낸 드 파이스트(De Vuyst) 박사도 5절의 ‘첫째 부활’에 대해 설명할 때 “신자들이 죽을 때에 그 영혼들이 새로운 방식의 생명에 들어가기 때문에 –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중간시대 동안에 –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주석가인 요스 껄러르스(J. Keulers)도 “그들은 살았다. 즉, 초자연적 생명의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는 계시록 20:5의 ‘살지 못하였다’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해 버린다. 다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에 대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로서 필경 멸망에 빠질 자들이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괄호 안에 흐레이다너스의 주석 중 한 문장을 화란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필자가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그들이 죽을 때에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에 들어갔다.” 그런데 흐레이다너스는 무천년설 입장에서 이 말을 한 것인데, 박윤선 박사는 아무 논평이나 설명 없이 괄호 안에 인용하고 있다. 흐레이다너스의 이 문장의 의미는, 불신자들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낙원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 시대에 불신자들이 죽을 때에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박윤선 박사는 흐레이다너스의 이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5절의 ‘그 나머지 죽은 자들’ 해석에 인용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여기서 “필경 멸망에 빠질 자들이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전천년설 구도를 따라 미래적으로 이해했지만, 흐레이다너스는 ‘들어갔다’(gingen … in)라고 과거로 말하였다. 하나의 작은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예는 박윤선 박사 자신은 전천년설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전반적인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얼마나 개혁주의적 해석, 특히 흐레이다너스의 해석을 존중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확실한 전천년설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는 조지 엘던 래드(G. E. Ladd)가 있다. 그는 5절의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였다”를 “천년이 차고 나서 살았다”로 잘못 읽고서, 그 잘못 읽은 것에 근거하여 천년 왕국(Millennium) 끝에 ‘육체의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천년 왕국의 시초의 ‘살았다’도 육체의 부활이 맞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천년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계시록 20:5의 “…차기까지 살지 못하였다”를 “…차고 나서 살았다”로 잘못 읽고 이해한 것에 기초해 있으며, 이것은 반명제(反命題)를 원명제(原命題)와 동일시한 데서 온 ‘논리적 오류’이다. 사실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며(음부에서 고통한다), 천년 후에도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이다(영원한 불못에 던지운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는 이런 논리적 오류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침묵하고 지나가 버린다.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전반적으로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취하지만 약간 미래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 미래에 있을 ‘세계 최후의 전쟁’으로 본 것이 그러하다. 물론 이 전쟁의 최종적 형태는 미래에, 마지막 날들에 일어나겠지만 그 시작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도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영적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꼭 영적 영역에서만 싸움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전쟁의 근본 성격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세력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엡 6:12-17; 고후 10:4-6). 실제로 이 세상에서는 신앙상의 이유로 전쟁과 폭력과 테러와 살인과 납치, 강도 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 이단들과 거짓 종교들과 거짓 학문과 거짓 이론과 세상 철학과 자유주의 신학과 비평 신학과 성적 유혹과 세상 쾌락과 게임과 마술과 온갖 유혹과 미혹을 통해 영적 전쟁이 날마다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을 이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다른 본문의 전쟁에 관한 서술(9:13-21; 19:11-16; 20:7-10)에 비춰 볼 때 타당하다고 생각되는데, 박윤선 박사는 다른 본문 해석에서는 개혁주의적 해석을 따라 넓게 잘 보았는데, 아마겟돈 전쟁 부분에서는 문자적 의미와 미래적 해석에 많이 치우친 것으로 생각된다.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는 역설적(逆說的)이게도 계시록 1:7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본 것이다. 많은 평신도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21세기의 신학자들에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시적 오심’ 또는 ‘역사적 오심’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중요한 이유는 이 구절을 다니엘서 7:13과 스가랴 12:10의 인용으로 보면서 구약의 배경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서 7:13과 계시록 1:7은 ‘구름을 타고’라는 것만 같고 나머지는 다르다. 다니엘서에서는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는데 반해, 계시록에서는 예수님께서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신다. 계시록 1:7에 구약 본문을 인용한다는 말도 없거니와, 유사한 구절 또는 배경 구절이 구약에서 발견된다 할지라도 신약의 구절은 신약의 문맥에서 해석해야 한다. 구약의 구절이라도 신약 저자에 의해 사용되거나 인용된다면 그 의미는 신약의 그 구절의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데(예를 들면 마 2:13-15), 신약의 본문을 구약의 본문에서 바로 해석하면 엉뚱한 해석을 갖다 붙이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큰 것이다.

계시록 1:7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사도행전 1:11과 마태복음 24:30(눅 21:17)의 문맥에서 볼 때, 그리고 요한계시록 전체의 상황에서 볼 때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계시록 1:7의 ‘오시리라’를 역사상의 상시적 오심으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로 여기 사용된 ‘오다’는 헬라어 동사(e[rcetai)의 시제가 현재인 것을 드는데, 이것은 헬라어 문법을 무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동사는, 영어에서도 그러한 것처럼, 현재로서 미래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오다’ 동사의 경우엔 미래 대신에 현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요 4:35; 14:28; 마 24:43, 44; 눅 12:40 등). 이런 점에서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에서 ‘구름’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논의 없이 주님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으로 본 것은 진리를 왜곡함으로 혼란케 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논의가 없었던 것은 당시에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은 간결하지만 전체적으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이다. 많은 부분에서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 교회 상황으로 볼 때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천년 왕국과 관련해서 전천년설 입장을 취한 것은 한국 교회 전체가 미국 선교사들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것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미래지향적 신앙을 형성하게 된 것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박윤선 박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은 구체적으로 각 구절의 해석에 들어가면 아쉬운 부분과 부족한 부분들이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개혁주의적 해석 경향을 띠고 있다. 이것은 특히 그가 흐레이다너스(크레다너스)의 견해를 많이 이용하고 인용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흐레이다너스의 견해라고 무조건 다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견해 중 ‘십사만 사천’에 대한 견해는 따르지 아니하는데, 이 부분에서 흐레이다너스가 잘못 생각하였으며 박윤선 박사가 바로 보았다. 또 무천년설 입장을 취하는 흐레이다너스가 ‘천년 왕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로부터 본 것도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데, 박윤선 박사는 자신의 전천년설 입장에 따라 재림 후로 본다.

결론적으로 박윤선 박사는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한국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따라 천년 왕국에 대해 전천년설 입장을 취하면서도 세대주의나 과도한 미래주의적 입장을 피하고 대체로 건전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제시한다. 이에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존중한 것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개혁주의 해석 원리를 철저히 따른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외경이나 위경, 전설이나 신화 등은 신용(信用)할 수 없는 것으로 정경인 요한계시록에 비교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배척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돋보인다. 그리고 그가 성경 원어뿐만 아니라 영어, 독어, 화란어를 배워서 익힌 것이 그의 주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독학으로 화란어를 배워서 화란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책을 읽은 것이 바른 개혁주의적 주석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흐레이다너스의 주석을 참고한 것은 그를 개혁주의적 해석으로 인도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박윤선 박사의 주석이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너무 간단하고 설명이 없는 부분이 있는 것과 오늘날 논란되는 것들을 다루지 못한 것들이 많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종종 좀 더 치밀한 논증을 제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 시대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 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기억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