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0주년을 맞아 제호 변경을 공론화 하자
나택권 장로(호산나교회, 본보 전 사장)
신문은 어떠한 사회이든 시대를 막론하고 그 사회와 시대를 이끌어가며 국민과 정부와 함께 국가를 떠 바치는 기둥으로서 서로 견인을 유도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볼 때 교단 신문인 기독교 개혁 신보는 우리 교단 내 970여 교회와 14만 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단을 튼튼히 세워 나가는 하나의 축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사명 또한 막강하다.
교단의 역사와 문화와 언론을 창출하고 정립하는 일에 이바지해야 하고 성도들을 교육하는 일과 계도하는 일 독자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매체로서의 역학을 감당하는 것이 교단 신문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어느 철학자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듯이 기독교개혁신보는 합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입이라고 한다면 신문에 게재되는 모든 언어는 우리 교단의 존재 자체가 드러나는 거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단 신문이 지교회와 성도들의 지원과 총회의 후원을 받고 운영되는 재정적 취약성이 있다 하더라도 교단 내 발생하는 현상이라든지 지교회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함에도 이를 지나친다거나 모든 교회들에게 이웃의 어려움을 즉각 알리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전달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일에 매체가 되어야 함에도 아직은 미온적이고 수동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단 신문이라 하여 신학자들의 논설, 학문 발표 등을 지면에 많이 할애하는 것 같은데 이것을 줄였으면 좋겠고 사설은 그 사(社)의 주장을 펼치는 논설로써 기관의 활동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칭찬하고 논평하는 것을 주로 하고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문장으로 짧게 하는 등 편집 방향을 바꿔 주었으면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권의 책도 쓰신 적은 없지만 요 8:5-9에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글씨로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원하셨다. 이 짧은 글로도 그 여인을 죽음에서 구원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달라는 뜻으로 학자의 혀를 달라고(사 50:4) 한 것이다. 이렇게 글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 소산이다. 그리고 그 글과 문장의 표현은 귀중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글이 신앙생활이나 정신생활이나 도더적 생활에 있어서 유익을 주는 글 또는 사람을 살리는 글이라고 한다면 교단지가 정기 간행물이라 하여 그 내용과 편집에 대하여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간된 지 지령 40년이 된 기독교 개혁 신보는 1982년 9월 8일 “개혁 총회보”로 창간하여 그 후 1986년 1월 26일 개혁 신보로 제호를 변경했다가 1992년 당시 청담 측과의 교단의 마찰로 말미암아 부득이 지금의 제호인 “기독교개혁신보”로 변경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용되어 온 교단 신문의 제호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아쉬움과 혼돈의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제호 변경을 공론화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첫째로, 신문의 제호가 너무 길다는 의견이 있고 둘째로, 개혁이라는 호칭이 들어 있어 개혁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타 교단과 혼돈이 있다는 점 셋째, 개혁이라는 단어를 제호에 넣어 사용함으로써 극단적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우리 교단이 배타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개혁이라는 원래의 의미는 결점이나 악습을 제거하고 이전의 선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으로 이는 신문의 내용과 정신이 개혁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호 자체에 개혁이라는 단어를 강조함으로써 자칫 내용이 따르지 못할 경우 이중적 논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명칭도 2000년 9월 25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라 호칭하도록 개정하였다.
우리 교단과 함께 성장 발전해 온 교단 신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줌도 또 다른 의미의 개혁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