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것을 신앙의 대의로부터 출발하자
우리에게는 신앙의 시야를 크게 넓혀 과거는 물론이고 내일의 종말까지도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사의 사정거리를 달려가는 형식과 자세의 신앙이 필요하다. 이러할 때 먼저 신앙의 유개념부터 확실하게 정립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올바르게 이루고 있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안에 속해 있을 때라야 종개념의 여러 신앙의 요소들도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유개념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복음의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 따른 것이라는 유일무이한 성격을 확신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성도들 각인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시켜 주셨다. 상기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인 교회가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신앙의 큰 틀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기타 모든 신앙적 요소나 행위들의 근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위에서 얘기한 신앙의 유개념의 원리에 견고히 서 나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러한 큰 그림을 깨닫지 못하고, 혹 깨달았다 한들 신앙의 유개념은 필히 자기부정 및 자기 십자가 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므로 의도적으로 이것을 외면하면서 대신 이런저런 부분적인 것들을 붙잡고 나가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경우 대체적으로 인본주의 종교행위로 빠지기가 쉽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모순이 도처에서 튀어나와 신앙의 대의를 옥죄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그러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당시 유대교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의 전체적인 대의, 곧 신앙의 유개념에 대한 이해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한데 따라 신앙의 세세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놓고 그것들을 철저히 지켜가는 율법주의 차원에서 신앙의 대의를 생각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한 유개념이 정확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즉 기도해야 하는가보다 하는 차원에서 소위 기도행위라는 것을 해나가게 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로 전락하는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현대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당시 유대교가 참된 구약종교에서 빗나갔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태도가 그러했기에 그들로서는 도대체가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신앙은 잘못된 것 투성이었다. 자기네는 지금 평안하고 아무 문제 없는데 느닷없이 개혁은 무슨 개혁타령인가 싶은 것이다.
이런 식의 태도가 현대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개혁신앙을 펼쳐나가기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개혁운동을 낭만처럼 여긴다거나, 한 시대에 살아야 할 유행처럼 생각한다거나, 또 하나의 교회부흥의 비결처럼 생각하는 기타 등등의 잘못된 개혁주창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중에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통상 왜 사람의 계명을 좋아하는 것인가? 그것은 신앙의 대의, 즉 신앙의 유개념은 자기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앙의 대의를 외면하면서도 여하튼 구원은 받고 싶은 데 따라 상대적으로 신앙의 종개념들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하는 차원의 대의가 이제 내가 무엇을 한다 하는 차원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핵심은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이다. 인간은 이 토대 위에서 이것을 전제로, 다른 신앙적 행위(기도, 전도, 금식, 헌금, 봉사)들도 비로소 가치 있게 되는 것이고 실제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이제 코로나19가 종식되어 가고 예배가 다시 회복되는 이 때, 우리 합신 총회는 신앙의 옷깃을 다시 한 번 단정하게 여미며 이런 자세로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