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이은숙 기자(본보 문화부 객원 기자)
우리는 늘 유동하는 시간 속에서 흘러내리는 인생의 모래들을 움켜잡을 수 없다는 막연한 아쉬움과 좌절감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아쉬움’에는 어떤 힘이 있다. 오늘을 더 아끼고 의미 있게 하는 힘, 주어진 우리의 날을 꽉 부여잡게 하는 힘 말이다. 그 힘은 우리의 몸과 근육이 굳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또한 하루하루 무언가에 경직되지 않고 살아왔는지 자문하게 한다.
최근 2년 동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현상에 갇혀 그 관성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칸 하나 옮겨 가듯 새로운 노트에 새해를 옮겨적어야 하는 연말이 되었다.
우리는 상투적 삶의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굴레와 장치들에 굳어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는가. 그러한 노력이 의미 있기 위해 우리의 삶이 온전히 주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세워져 있었는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세라핌(Seraphim, 서랍) 천사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세라핌 천사가 세 번씩이나 거룩하다고 고백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두 날개는 얼굴을 가렸다. 거룩하며 순수한 세라핌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그 눈부신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는 없었다. 그분께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으로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존재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두 날개로는 자신의 발을 가리는 데 사용했다. 이사야가 살았던 고대 시대에는 전통적으로 신하가 왕의 전에 오게 되면 자신의 발을 가림으로써 왕 앞에 느끼는 겸손함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바로 세라핌도 절대적으로 고귀하신 분의 존전에서 자신들의 완전한 겸비함을 나타낸 것이다. 세라핌들은 자신들이 모든 왕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존전에서 그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을 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여섯 개의 날개 중 단지 두 개의 날개로만 나는 데 사용하였다. 나머지 날개들은 오직 그분을 흠모하고 높여드리는 데에만 사용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사야에 묘사되는 세라핌 천사의 모습을 통해 필자의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얼굴과 발을 가리는 겸손함과 참회로 나아가는 삶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얼굴과 영광을 주인공 삼고 민낯을 드러낸 교만한 삶이었는지를 돌아보았다. 주님의 얼굴만을 구하며 살았다면 평안과 위로를 얻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위태로웠던 지난 시간이 가슴 아프게 떠 올랐다. 팬데믹이라는 환경적 제약을 영적 무능력에 대한 핑계로 삼았다.
새해에는 나의 모든 것을 드려 오직 주님을 흠모하고 높여드리는 데만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연말 참회하며 주님의 존 전에 엎드려 경배하기를!
비록 코로나 방역 정책의 혼란 속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주님의 얼굴을 잊고 방황하는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오늘을 하나님 앞에 부여잡고 참된 의미로 한 해를 마무리하기를. 살아 숨 쉬는 3차원의 생명은 삭제된 채 소셜미디어(social media) 안에서 키보드 몇 개 두드려 멀티버스(multibus)를 이동하듯 새해를 맞이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을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며 맞이하는 새해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