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의미
장홍태 선교사(GBT, SIL아시아 디렉터)
고독의 시간에 그분만 대면하고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오롯이 배운다
와에나(Waena, 인도네시아령 파푸아의 자야뿌라 인근)의 디안 하라빤 병원(RS. Dian Harapan)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날도 새벽까지 내 몸이 깨어 있길래, ‘이건 뭘까?’ 했다. 물론 아직도 잠들지 못할 때, 밤낮 비슷한 질문을 계속한다. 잠 못 드는 시간이 속히 지나 주었으면 좋겠지만, 느리게만 느껴지니 이건 마치 초침이 분침 지나듯 천천히, 그것도 분간 표시 칸막이를 등반하듯 탔다 내렸다, 올레길 코스를 돌 듯한다.
고통을 참으려 할 때는, ‘그냥 잠시 내가 죽은 것으로 치자!’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치과 치료대에 누울 때나 내시경 검사를 받으려 할 때도, 종종 나는 그런 생각으로 몸을 맡기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경험이 가장 두드러졌던 건, 마침내 선따니(Sentani)를 출발해 마닐라 거쳐 인천으로 오는 응급 후송편 에어 앰뷸런스 속에서였다. 환자 두 사람을 태울 정도의 공간이라길래 예상은 했던 것이지만 – 아마 PC12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비행기를 좀 아는 아들이 나중에 알려주길 우리가 탄 건 더 빠르고 높이 나는 Hawker 850 XP기였단다 – 나는 미니 비닐하우스 같은 코로나 환자 이송용 음압 캐리어에 담겨 비행기에 뉘었고, 비행기의 선미 방향 내 발치로는 아내가 앉았다. 그리고 나의 옆으로는 서로 비껴갈 수 없을 만큼 빠듯한 공간에 모두 합쳐 네 명의 진료 수행원이 서로의 어깨와 무릎을 다닥다닥 붙이고 꼬불쳐 앉았다.
그렇게 꼬박 비행에만 11시간, 병원서 출발한 것부터 치자면 족히 13시간은 되었을 것 같은 응급 후송 여정 내내, 나는 나대로 무릎도 세우지 못한 채 곧게 누워 있어야 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형편도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병원서부터 나를 따라나서 나의 고국까지 그 오랜 시간 비행하였다가, 곧장 피곤한 귀국길에 올랐을 진료 수행원들에게 우리의 불고기라도 들고 가시라고 돈을 잡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공항 바깥으로 가려면 그들도 격리 대상이었을 터, 그리고 지갑도 내 호주머니에 있지 않았다.
내겐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만 보이던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나를 황급히 응급차로 인계하고 비닐 바깥에서 손을 한두 번 흔들어주고는 다시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비행기 속에서 그나마 휴식을 누린 사람은 아내가 유일했을지 모른다. 워낙에 잠이 고팠던 아내는 그날도 새벽같이 우리의 파푸아 동료 홍 선생님의 차편으로 병원으로 와서는, 병원 어느 벽면에 기대어 잠들었다가, 비행기에 오른 후에도 바로 고개를 떨궜다. 내 발치 비닐 아래로 어른거리던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며, 단지 이착륙 시에 내 몸이 캐리어 속에서 뒤로나 앞으로 쏠리면 자신의 손으로 내 발을 지지해 주거나, 내 발바닥을 꾹꾹 누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 주었을 따름이다. 나중에 들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자 아내 역시 산소 호흡기를 하였고, 그 뒤로는 잠에서 한두 번 깼을 때만 내게 익숙한 그 물음, ‘여기는 어디죠?’를 수행원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비행기 벽면 중간 즈음에는 비행기의 현재 고도, 속도, 남은 거리와 시간 등을 알리는 자그마한 패널이 부착되어 있었다. 간호사들이 움직일 때, 나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그 패널을 한 번 보겠다고 용을 쓰곤 했다. 기대 같아서는 다음에 눈에 띌 때 남은 시간이 30분, 혹은 15분이라도 줄어서 보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지만, 한 시간이 지난 듯하면 겨우 10분이 지나 있고, 그나마 채 2~3분이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내가 눈을 의심하고,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가지?’ 하고 절망감을 느낄 정도로,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온몸은 뻣뻣하게 굳어져만 갔다. 그러면 나는 거의 ‘영끌’ 수준으로 아는 찬양을 죄다 속으로 부르고, 다시 패널로 눈을 돌리곤 했다. 그렇게 11시간을 버틴 것이다.
이 답답한 시간의 의미는 뭘까? 생각해 보니, 이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들과 홀로 누워서 지낸 날이 병원서만 꼬박 파푸아, 서울 합쳐서 19일이 되었고, 선따니 집에서 아팠던 것이 5일, 그 전 자카르타에서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선교회 연합 게스트하우스 (CMA Guesthouse)에서 2주를 혼자 지냈으니 또 14일이 된다. 이래저래 도합 한 달은 넘는 셈이다. 내게, 이 시간의 집합은 ‘고독’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아내나 다른 누구하고라도 함께 하지 못하고 뚝 떨어져 지내는 시간, 그런 장소가 부득불 침묵이고 고독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고독은 깊은 절망이고 우울일 것이다. 내가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누구와 말벗을 할 수 없고, 마치 혼자인 듯 살아야 한다는 것, 교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울하다. 하지만 때로, 우리의 삶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성경이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고독이 그랬고, 일부러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나가셨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부러 그런 시간을 벌도록 우리를 초대하시지 않는가?
외로운 곳, 그래서 주님과 대화할 밖에는 달리 대화 상대자가 없는 곳으로 초대되어, 그분만을 대면하는 것은 복되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들의 관심사에 집중하고, 또 그들의 인정에 목맬 때가 많다. 좋게 보자면 그들의 아젠다에 우선순위를 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대화 중에도 진정한 관심을 받아 마땅한 그분께 집중해야 할 관심도를 잃기가 쉽다. 그래서 대화 후엔,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하는 후회가 몰려올 때가 있었다. 오히려 세상만사로 시끄럽고 염려마저 엄습할 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이르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게 주신 고독의 시간은, 그래서 ‘조용히 있으라, 잠잠하라, 혹은 안심하라.’라는 말씀으로 읽혔다. 연이어,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라는 말씀도, ‘내가 내 앞에서 가만히 있는 너희에게 내 이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씀으로도 들렸다. 이 고독의 시간에 그분만 대면하고 홀로 있으면서, 그분의 하나님 되심, 나의 피난처이자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심을 오롯이 배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삶이 그분께만 더 집중할 수 있게, 나의 안전과 성취에 나 스스로 초미의 관심사를 두지 않게 긴밀히 가르치시는 그분과 지금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