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 면하기_이경엽 집사

0
68

촌놈 면하기

이경엽 집사(온수교회)

 

코로나19에게 고스란히 바치다시피 한 작년 한 해를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올해도 거의 헌납을 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그보다 더 막막한 것은, 앞으로도 얼마를 더 기다려야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될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마치 끝이 어딘지 모르는 어스름한 터널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 각국에서는 경쟁을 하듯 치열하게 개발해 온 백신을 80% 육박하게 접종하고 있다. 그럼에도 확진자의 숫자는 쉽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코로나가 길어지니 사람들의 인내심도 차츰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둣하다. 하루속히 예전과 같은 일상생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지친 얼굴에 고스란히 얹혀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갈급해하는 것은 아마도, 집을 떠나 어디든 다녀오고 싶은, ‘여행 목마름’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비행기를 타본 지도 퍽이나 오래된 것 같다. 자주 타보는 것이 아니라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것은 약간의 두려움을 곁들인 즐거움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삼십여 년 전, 신혼여행차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을 때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서야, ‘이젠 촌놈 소리를 듣지 않겠구나.’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촌놈 소리를 꽤 들으며 살았던 것 같다. 그 당시 가장 많이 촌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마도 ‘서울을 가보지 못한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그 후에는 ‘기차를 못 타본 사람’, ‘비행기를 못 타본 사람’, 그리고 고속 전철 등과 같은 첨단 문명의 혜택을 이용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체로 촌놈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 같다.

내 나이 올해 육십이다. 백세 시대라고 하는 요즘에 예순 살은 아직 한참 때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삶의 분수령이 멀지 않아 보이는 느낌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이 육십이 되면 이순(耳順)이라 하여 듣는 귀가 순하여 어지간한 것은 다 이해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 삶의 모양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그러지를 못한 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별로 잘난 구석 없이 육십 년을 살아왔기에 남은 삶도 촌놈 소리를 한참은 더 들으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촌놈 여부를 따지면서 살아가게 될까? 어쩌면‘ 우주선은 타보셨나요?’ 혹은 ‘달나라는 가보셨나요?’ 등과 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계속 촌놈 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은 둘째치고라도, 자식들이 이제 다 컸으니 시집 장가를 보내고 손주를 안아보는 것도 촌놈 여부를 가리는 잣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친구가 SNS 프로필에 귀여운 손주의 사진을 올린 것을 보니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촌놈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은 대체로 세 가지 이유로 인해 공평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하루에 스물네 시간씩 똑같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점에서 사람은 어느 정도 공평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배웠건 못 배웠건, 부자건 가난하건, 잘났건 못났건 간에 모두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살아오는 동안에 숱하게 들어왔던 촌놈 여부는 삶의 끄트머리에 섰을 때도 가름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생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서울엘 못 가보고,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촌놈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한번은 만회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이 종점에 다다를 때가 되면 과연 무엇을 가지고 촌놈 여부를 따지게 될까? ‘죽어보셨나요?’, ‘저승엔 가보셨나요?’하고 묻는 건 웃자고 하는 농담일 테고, 무언가 삶에 대한, 좀 더 ‘목적 지향적’인 물음이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언제부턴지, 마치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놓은 것처럼, 하나의 또렷한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름을 느끼곤 한다.

“당신은 주님을 영접했나요?”

그것은 때로 어린아이의 해맑은 물음 같기도 하고, 때로는 무명치마에 번지는 핏물처럼 선명한 절규로 귓전을 울리곤 한다. 그것은 또한 숨이 붙어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고, ‘예’, ‘아니오.’ 외에는 결코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절대적인 물음으로 서서히 압박을 가해 온다. 서울엘 가보고 못 가본 것이나, 비행기를 타보고 못 타본 것이 어찌 이에 비할 수 있을까. 생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자에게 삶의 촌놈 여부를 가름하는데 이만한 물음이 또 어디 있을까.

코로나19로 인해 삶이, 전혀 의도되지 않은, 낯선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변하여 어디로 갈는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사는 게 마냥 불안하고 자칫하면 방향을 잃은 돛단배처럼 표류하기 쉽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는 동안에는 비록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촌놈이란 소리를 들으며 살았을망정, 세상을 떠날 때만큼은 최소한 ‘영(靈)적인 촌놈’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생의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당신은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했나요?”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야 당연하지. 영접하고 말고”하면서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촌놈이란 딱지를 확실하게 떼어 버리는 최상의 삶이 아닐까 한다. 코로나19로 어지러워진 삶의 모양새를 차근차근 둘러보면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시금 여며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