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이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_박종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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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박종훈 목사(궁산교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과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바람직한 인간이 되리라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산책길에 산벚나무를 심고 길을 정비하며 관리한 지 벌써 만 13년이다. 산책길은 심신에 도움을 주며 즐거움을 준다. 고라니와 꿩과 새소리, 소리 없이 솟아오르는 온갖 야생화와 잡초들은 늘 반갑다. 오감으로 전해오는 자연의 혜택을 맛보는데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손수 심은 산벚나무이다.

처음엔 같은 토양에 비슷한 크기로 세 살 박이 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조금 자란 것도, 열배나 더 크게 자란 우량나무도 있다. 토양의 조건은 비슷하나 일조량 차이가 있었다. 산벚나무만 있는 곳에는 기지개를 켜듯 힘차게 자랐지만, 볕뉘를 막는 장애물 옆에서는 비쩍 마른 모습이 되었다.
그 장애물은 바로 대나무와 칡덩굴이다. 그것들은 성장이 워낙 빨라 햇볕을 차단하였다. 인간도 삼시세 끼를 먹어야 에너지가 생기듯 나무들도 필요한 일조량이 있다. 그게 충분치 못하면 살아 있어도 성장을 못하고 생명을 겨우 유지하거나 병들어 죽기도 한다. 이미 몇 그루가 살아남지 못했다.

인간도 햇볕과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 궁핍한 시절에는 영양실조와 열악한 보건환경 때문에 후진국형 질병이 많았다. 지금은 충분한 영양공급과 의무교육으로 삶의 질이 높아졌다. 하지만 마땅히 받아야 할 어린 시절의 충분한 사랑의 부족은 평생 다양한 정신적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나무는 소리 없이 죽거나 성장이 멈추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은 자학, 폭력성, 원만치 못한 대인관계 등으로 나온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 대신 ‘부족한 세 살 사랑 여든까지 간다’고 말하고 싶다. 궁핍한 사랑의 갈증은 어른이 되고 충분한 사랑을 누릴 환경임에도 내면에는 숨어 우는 아이의 모습을 가진다.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을 베풀 줄 안다는 평범한 말을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강아지를 키워 보았는데 주인과 모두를 거부하는 이상행동을 했다. 달래고 간식을 주어도 사람을 따르지 않기에 결국 가축 상인에게 팔고 말았다. 원인을 생각해 보니 강아지 때 훈련시키느라 손으로 몇 번 때린 것이 기억났다. 그 후부터 다가가면 두려워 떨며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성 없는 동물도 강아지 때의 아픈 기억에 주인을 따르는 본능을 거슬러 거부감을 표한 것이다. 하물며 영혼을 가진 인간이 받아야 할 사랑이나 돌봄이 부족하면 그 결핍이 내적 영양실조로 나타난다. 만물의 으뜸인 인간이 유아 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가족들이 나중에 주려 해도 이미 자라 버린 아이들은 마음으로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마치 흘러가 버린 강물을 되돌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세 자녀를 키우며 되돌아보니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태중의 영향이 고스란히 미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성격과 선호 음식까지도 산모의 당시 형편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산모에게 보고 듣고 먹는 것은 물론 정신적, 육체적인 것, 언행까지도 삼가 조심하며 태교에 공을 들였었나 보다. 산벚나무의 성장에 일조량을 막는 가장 큰 방해가 주위 나무라면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들의 그늘은 바로 돈과 이기적 욕심이다.

사랑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다. 돈으로 거래 된다면 사랑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또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누구도 스스로 자라지 못했듯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은 받은 사랑을 되갚는 원리이다. 작금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근원은 사랑의 결핍이다. 사랑의 결핍이 범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 아닐까? 필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폭력을 당한 아이들이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사랑이 결핍된 아이는 사랑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인간에게 생명이 최우선이라면 그 다음은 사랑일 것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태어났다. 가족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나중에 자신과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바람직한 인간이 되리라 기대한다. 산책길 벚나무가 마음껏 자라도록 햇살을 막는 나무들을 제거하여 주는 작업을 즐겁게 마치었다. 올 해는 더 활짝 핀 벚꽃을 기대하며 고맙다는 나무의 인사를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