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3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의롭게 심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하고 거룩하고 의로우며 그 통치는 온 세상 만물과 만인에 미친다
지난번 글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왕”이란 칭호가 사용되며, 왕의 직능에 속하는 “재판”이 하나님께 돌려진다는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통치자”로 소개하는 구약의 내용을 더 살펴보려고 한다. 구약에서 “다스리다”, “통치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대략 다음 세 가지다: “말락”(mālâk), “마샬”(māšâl), “라다”(rādâh). 물론 이 단어들은 인간 왕들의 통치행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 또는 “여호와”가 이 동사들의 주어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말락”의 경우 출 15:17-18; 삼상 8:7; 시 47:8[9]; 93:1; 96:10; 97:1; 99:1; 146:10; 사 24:23; 52:7; 겔 20:33; 미 4:7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하나님”/“여호와”는 온 세상 백성과 나라와 세계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시온에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다. 이 왕의 통치는 시간, 장소, 상황에 제약받지 않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통치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 47:8[9])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미 4:7)
시편 93:1이나 96:10에 나오는 표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YHWH mālāk)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모빙켈(S. Mowinckel)을 따르는 소위 “신화-제의 학파”(“Myth and Ritual” school)와 “웁살라 학파”(Uppsala school)는 이 표현을 “여호와가 왕이 되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해가 바뀌는 시점에 신년 축제(바빌론에서는 “아키투” 축제)가 있었고, 이때 혼돈의 세력을 정복한 신의 재등극을 알리는 선언이 있었다는 가설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바빌론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신년에 여호와가 다시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기리는 축제가 거행되었으며, 이때 “여호와가 왕이 되셨다”는 선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불확실한 가설에 근거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구약학자 소긴(J. A. Soggin)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행해진 신년축제의 경우 그 구성요소들조차 분명하지 않으며 어감에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서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구약 시편에서 사용된 구문구조(주어+완료형 동사)는 히브리어 문법에서 주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아도나이 말락”(YHWH mālāk)은 “환호 또는 선언 공식”(acclamation or proclamation formula)으로서 “다른 신이 아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되 영원부터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비록 세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고 통치자들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나라들과 왕들을 일으키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최고의 주권자시다(단 2:21 참조). 기원전 8세기 말은 고대 근동의 초강대국 앗수르가 최전성기에 있을 때였다. 이때 앗수르 왕 산헤립(Sennacherib, 재위 705-681 BC)은 자신이 온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절대자인 양 행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도전하였다. 그는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왕하 18:35; 사 36:20)고 하며 도를 넘는 교만을 보였다. 그 결과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18만 5천의 부하들을 잃고 아들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었다(왕하 19:35-37; 사 37:38). 천하를 호령하던 산헤립도 결국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권세는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것이었을 뿐이다(왕하 19:25; 롬 13:1 참조). 세상에서 성취되는 일은 결국 모든 것을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하늘 대왕의 뜻이다.
“말락”과 마찬가지로 “마샬” 또한 하나님의 제왕적 통치를 표현한다. 물론 “마샬”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배(시 8:7), 비정치적 의미에서 인간 사이의 주종관계(창 3:16; 37:8), 자신을 다스리는 극기(창 4:7; 시 19:15[14]), 정치적 의미에서 인간 왕의 다스림(삼하 23:3; 왕상 4:21[5:1])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삿 8:23; 시 22:28[29]; 59:13[14]; 66:7; 89:9[10]; 103:19, 22; 사 40:10; 63:19에서 “마샬”은 하나님의 제왕적 통치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최고의 왕이시며, 특별히 자기 백성의 원수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소멸하시는 심판자시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상급”과 “보응”을 포함하며, 온 세상 만물도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다.
“진노하심으로 …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 알게 하소서”(시 59:13) “여호와께서 …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 103:19) “보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 40:10)
“라다”의 경우 직접 하나님의 통치행위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바 동물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표현하며(창 1:26, 28), 나아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왕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메시아 왕의 다스리는 역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시 72:8; 110:2). 하지만 창조시 인간에게 부여된 역할이나 메시아 왕의 역할은 모두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이기에 청지기(steward)나 부왕/대리 통치자(viceroy)의 역할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다”로 표현된 인간 또는 메시아 왕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한다. 넬(P. J. Nel)은 “라다”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동사는 “힘에 의한 지배행위를 강조한다. 따라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마샬(mšl)의 의미와 겹친다.”
온 세계와 만민을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제왕적 위치와 권세는 “보좌”를 의미하는 단어 “키세”(kîssē’)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표현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보좌”에 좌정하여 계시는 하늘의 대왕으로 묘사된다: 왕상 22:19; 대하 18:18; 시 9:4[5], 7[8]; 11:4; 45:6[7]; 47:8[9]; 89:14[15]; 93:2; 97:2; 103:19; 사 6:1; 66:1; 렘 3:17; 애 5:19; 겔 1:26; 10:1; 43:7; 단 7:9.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시는 왕이다. 통치의 시작과 종결로 특징지어지는 인간 왕의 보좌와 달리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하다. 부정하고 속되며 불의한 일로 가득한 세상 왕들의 보좌와 달리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하고 의롭다. 땅의 한 지역에 제한된 인간 왕의 보좌와 달리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고 그분의 통치는 온 세상 만물과 만인에 미친다. 하나님은 특별히 자기 백성들 가운데 보좌를 두신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4)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 103:19)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 47:8)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렘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