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적인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으로 보는 “나”의 차이
– 칼빈 기독교 강요 제2권 1장 1~3절 묵상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죄와 비참을 아는 우리 자신의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
박동근 목사(안양 한길교회)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2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해설한다. 이 교의(敎義)의 중요성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달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을 절실히 갈망하고 의지하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타락상을 깨달은 자만이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칼빈의 해설들을 따라가노라면, 우리는 산상수훈의 팔복의 메아리를 듣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칼빈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의 피조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치듯,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인 됨을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지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칼빈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세상도 언제나 자기 지식의 필요성을 인식하지만, 세상은 철학을 동원하여 자기 가치와 탁월함을 부풀리는데 목적을 두었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자기를 과대포장하고 남의 칭찬 받는 것을 그 무엇보다 열렬히 추구한다. 모든 사람의 맹목적 자기애(sui amor, self-love)는 타고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을 드높이려는 사상들이 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는다. 인본주의(humanism)가 만연한 오늘날 진실한 신본주의는 교회에서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번영의 신학을 추구하는 어떤 목회자들은 죄를 설교하는 것이 인간의 자존감을 헤치므로, 설교해서는 안 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문제이며 현대교회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비참을 보지 못한 채, 인간을 높이고 미화하는 사상에 찬동하게 될 때, 우리는 파멸하고 만다. 죄와 비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마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성경은 타락 전 최초의 존귀함(prima dignitas, primeval dignity)을 알려주므로, 지금 우리의 상태가 어디로부터 떨어져 내렸는지를 깨우친다. 인류는 첫 사람 안에서 몰락하여 그 탁월함을 상실했다. 성경을 통해 인류의 첫 조상이 가졌던 존귀함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심은, 인생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것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깨우치기 위함이다. 또한 모든 선한 것에 있어 우리 자신의 것이 없으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존귀함으로부터 나락(奈落)으로 떨어진 우리의 비참을 깨달아 죄에 대한 미움과 혐오를 가지는 동시에 겸손해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열심을 불붙게 한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은 너무도 중요하여, 세상도 자기 자신을 알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상과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아는 방식은 너무도 다르다. 세상은 육체의 판단(iudicium carnis, carnal judgement)을 따라 자신을 인식한다. 육체의 판단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를 잘 안다고 확신하며, 스스로를 의롭다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인간의 판단과 다르다. 하나님의 잣대와 인간의 잣대는 너무도 다르다. 하나님의 판단의 잣대(amussis divini iudicii, the standard of divine judgemnet)로 판단하게 되면, 인간은 낙심에 빠지게 되고, 마지막 남은 확신마저도 모두 상실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혼의 근심이 오늘날 얼마나 목마른가? 구원의 이르게 하는 근심이 얼마나 복된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과 망상을 깨부수시려고 우리의 조상 아담에게 주신 최초의 존귀함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다. 타락 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의로움과 선함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 안에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열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떨어져 나온 그 원천(origo, origin),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주신 그 원천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그것을 상실한 우리의 처지와 비참에 대해 한숨을 내뱉으며, 최초의 존귀함을 헤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의 지식에 대한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해야 할지 다음과 같이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창조의 목적과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가치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창조자로 인식하고 우리 자신을 피조물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를 잃고, 창조의 목적을 역행한 우리의 죄악의 엄중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결핍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無)에 이르도록 작아진 채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구원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 번째 지식은 우리의 직분을 일깨우고, 두 번째 지식은 그것을 수행할 능력과 은사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의 목적을 대적하고, 그 목적을 이룰 은사를 상실한 우리의 비참을 깨닫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회복을 구하고 찾는 데 있다.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은 복되다. 이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죄와 비참을 아는 우리 자신의 지식과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되어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됨이여! 하나님 앞에 영혼이 겸손한 사람들의 복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