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글룸 가는 길
장홍태·이금숙 선교사(GBT, SIL 인도네시아)
겹겹이 싸인 구름이나 수천 리 정글 속보다 깊은 불신과 거절의 장막을 뚫고 마침내 빛을 선사하시는 그 사랑
오랜 친구 네이트(Nate)와 함께 간만에 선따니(Sentani)에서 망글룸(Mangglum)으로 가는 경비행기에 동승한다. 끊임없이 지직거리는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방언을 알아듣고 제때에 응답하는 그의 능력에 새삼 놀랐다가 연신 새하얗게 눈에 부시는 구름을 피해 발밑 아래 밀림으로 눈길을 돌린다. 긴 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불구불하게 꼬인 강의 형세는 차라리 제멋대로 벌레 먹은 과실의 속 같다.
저 길과 강을 걷고 또 건너 망글룸으로 간다 치면 얼마나 걸려 나의 임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잠시 빠졌다가 절로 고개를 내젓는다. 그리곤 이내 떠오르는 나의 첫사랑, 오지로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한 선교사의 수필이 떠오른다.
대학 시절 어떤 선교잡지에 실렸던 그 글에서 정글 속 마을을 찾아 헤매던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멀고 깊이 숨은 마을의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가시는지를 관찰했다. 날고 있는 듯한 성경을 뒤에서 붙잡고 유영하는 듯 묘사된 삽화에 대한 기억이 아직 뚜렷하다. 그 그림을 옮겨서 영어사전에 붙여 두고 펼칠 적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고향 집 어디엔가 아직 그 그림이 있을 텐데…….
그 글이나 그림이 내게 남긴 선명한 인상은, 사람의 열심이나 열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선교사 자신이 마을을 찾아 헤맬 때도 저자는 자신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했다. 보내고 기도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헌신도 실은 그들에게 불러일으키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면 생성될 수 없는 영적 동력이다.
생각에 잠긴 사이 우리 비행기는 중간 기착지인 끼위록(Kiwirok) 상공에 도달했다. 마을은 온통 짙은 구름에 뒤덮였고 여태 네이트의 부름에 응답하는 어떤 라디오 답신도, 현재 활주로의 상황을 전하는 동료 조종사의 교신도 없다. 상공을 선회한 후 결국 우리는 망글룸으로 직행한다. 아직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묵묵부답인 사람들의 심령이나 민족들의 영적 현실이 이와 같을까? 네이트는 선따니로 돌아가는 편에 일기를 살펴 다시 착륙을 시도해 보겠다고 약속한다. 기다리시고 다시 마음 문 두드리길 그치지 않으시는 그분의 마음조차 이 비행이 재현하는 느낌이다.
이내 도착한 망글룸의 하늘에는 감사하게도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노련한 네이트는 다이빙하듯 구름 새로 필라터스(Pilatus PC-6 Porter)의 이마를 들이밀고, 시야가 확보되는 대로 구름과 정글 사이 야트막한 대기층으로 접영을 시도한다.
오늘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는 망글룸의 활주로 검사다. 활주로의 규정에 아랑곳하지 않는 멧돼지들의 반란으로 한동안 닫혔던 곳이라 눈으로 보기에 착륙함 직하다고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다. 밤새 내린 억수 같은 비로 질척하기 이를 데 없는 정글 활주로 속으로 이내 그의 실력보다 큰 믿음의 착륙이 시작된다.
“나이스 랜딩(Nice landing)!” 나의 진심 어린 칭찬에 환히 웃음 진 셀피로까지 답하고 부지런히 나의 짐을 내려 준다. 비행기를 쳐다보니 날갯죽지와 몸통이 온통 진흙투성이다. 활주로 위에 선명한 바퀴 자국은 아까 본 강의 그것에는 못 미치지만, 네이트의 조종간을 주님께서 함께 쥐고 계셨던 줄은 확실 히 알겠다.
활주로 검사를 마친 네이트에게서 미리 속으로 ‘좋은 답은 기대하지 말아야지.’ 했다. 그런데 이 대범한 친구가 하는 말, 울퉁불퉁한 구멍들만 메우고 풀만 잘 깎은 후에 내가 괜찮다고 하면 자기들도 괜찮겠다고 한다. 그리곤 씩 웃으며 덤으로 하는 말, “우리는 어쨌거나 선교를 위해 있는 거니까 (We’re anyway for the mission)!”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까지 다가갈 것인가? 난 조금 전까지 이 밀림 속으로까지 찾아오시는 그분의 끈기에만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네이트의 마음, 나의 마음… 겹겹이 싸인 구름 속보다, 수천 리 정글 속보다 깊은 불신과 거절의 장막을 뚫고 들어와 마침내 빛을 선사하시는 그 사랑, 그 열심은 대체 어디까지 이를 것인가!
오, 주님. 당신의 사랑과 능력 앞에 다시 한 번 무릎 꿇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변함없으신 열심으로 우리의 마음속 철옹성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는 그 손길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나라와 뜻이 온전히 이룰 때까지 다가오고 또 다가오십시오.
- 장홍태 선교사는 합신(18회)을 졸업한 후 1998년 GBT의 성경번역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국제 SIL의 회원으로 2008년까지는 주로 인도네시아령 파푸아의 왐본 부족을 위한 언어 연구와 성경번역에 종사했다. 이후 부인 이금숙 선교사가 왐본 사역에 전념하는 동안, 번역 일선에서 물러나 번역 컨설턴트 SIL의 아시아권 지역 부대표와 대표 책임을 맡아 오고 있다. 왐본어 성경은 작년까지 신약 전체와 구약 일부의 번역을 마쳤고 성인과 주일학교를 위한 왐본어 교재를 개발 중이다. 최근 그 간의 선교 여정을 담은 <변수, 하나님의 쉴 수-선교 여정 그 주변의 축복(바른북스, 2021년 2월)>을 출간하였다.
변수, 하나님의 쉴 수
장홍태 저, 바른북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