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선포하라
<고상섭 목사 | 그 사랑교회>
진정한 삶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을 감지했을 때 전인에서 흘러나온다
오늘날의 시대는 진리와 도덕의 가치가 아니라, 심미적 추구의 시대인 듯하다. 진, 선, 미가 있다면 진리와 선이 아닌 미적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시대이다. 교회는 통상적으로 진리와 선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대들에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세계의 전망이 열리고, 또한 영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죄에 대한 가증스러움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아름다움’은 세상 가운데 파생된 아름다움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체로부터 나오는 본류적 아름다움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먼저,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성 삼위 하나님의 연합은 서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충만해있다. C.S. 루이스는 삼위일체의 연합을 한 편의 드라마와 춤과 같다고 묘사했다.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움 춤이며, 그 아름다움이 흘러 넘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반영되어 있다. 창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창조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편 8편은 창조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또한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결국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하며,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누릴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시며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의 신성도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의 절정은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빛난다. 아름다움의 핵심인 거룩과 탁월하심은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계시되는데 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크 존스, 달라스 윌라드, 존 스토트,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쓴 그리스도에 대한 책들을 모두 살펴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제공해준다.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직접 경험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런 책들은 기도로 들어가는 도구가 된다.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인 정보를 가지고 기도할 때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우리는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또 이땅에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모이는 곳이나 활동하는 공간이 아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곳이며, 이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이며, 삼위일체의 연합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이다. 교회가 불완전하지만, 영광스러운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듯이, 교회는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그 아름다움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정감(Affection)이 변화되려면 어떤 대상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을 감지했을 때 전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것이다. 진리와 선보다 아름다우심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욱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름다우심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음악에 매료된 사람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밤낮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을 것이고, 영적으로 거룩한 삶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화란 칭의로부터 흘러나온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진리도 도덕도 관심이 없는 이 시대를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선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