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칼럼
지금 인류 앞에 놓인 최대 과제는
<황영철 목사 | 성의교회>
전쟁, 기근, 질병, 가난이 강물 위에 찰랑이는 잔물결이라면,
나님의 나라는 그 강물 전체를 이끌고 가는 흐름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이 사태로 인하여 무너진 경제를 어떻게 다시 일으키느냐,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아니다.
인류의 최대 과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심긴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자기 마음에 기록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 복음과 함께 지상에 임하여 지금 힘 있게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의 왕의 통치를 받는 것, 이것이 인류와 각 개인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이다.
이런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 17: 26-30 )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해결되면 다음 고민이 기다리고 있다. 한 끼를 때우면 다음 끼니를 위해 애를 써야 한다. 한 가지 질병이 치료되면 다음 질병이 기다리고 있다. 한 번의 불경기가 지나가면 다음 불경기를 대비해야 한다. 한 번의 전쟁 위기를 넘기면 다음 전쟁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매일매일 자기에게 닥치는 일, 사회와 인류 앞에 놓인 문제와 씨름하면서 살다가 죽는다.
이렇게 하면서 정작 큰 일, 주 예수께서 심판자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준비하지 못한다. 자기 안에 심겨진 신지식의 활동을 억누른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도덕적 명령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일신의 행복만을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살고 있을 뿐이다. 마귀가 이생의 염려를 도구로 삼아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리고 거기서 각 개인이 당하는 고통은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결국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질병으로 인해 좀 더 일찍 사망에 이른다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까닭에 그 현실에 정당하게 대처하지 못할 뿐이다.
코로나로 경제가 무너진다고 법석이지만 그건 좀 더 가난하게 살면 된다. 나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가난했다. 그래도 충분히 살 만 했다.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치 가난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혹은 가난해지면 안 될 것처럼 법석인가, 이해가 안 된다. 그것도 지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가난이 강물 위에 찰랑이는 잔물결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강물 전체를 이끌고 가는 흐름이다. 한편에서는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 전체와 각 개인의 운명을 휩쓸어가는 원대한 통치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속에서 건설되고 있는 은혜의 왕국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정작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코로나 팬데믹과 경제의 붕괴와 강대국의 패권 싸움보다 훨씬 중요하고 인간의 실질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누가 이 사실을 알고 그게 걸맞게 행동할 수 있는가? 불신자에게서는 물론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에 나가기는 하되 자기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나가는 사람들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이 진리를 깨닫고, 코로나와 경제와 전쟁을 다 초월하여 하나님의 나라 전진에 자신을 투신할 수 있는가? 그것은 중생에 의해서 그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요 3:3, 5).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지식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코로나와 경제 위기와 전쟁의 소문을 듣고도 불안해하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모든 난리와 난리 소문이 그들의 마음속에 불안은커녕 새로운 소망을 일으킨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즐거운 기대이다.
이들은 코로나, 경제위기, 미중의 패권과 그로 인한 소란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증명할 기회로 삼고자 한다. 첫째, 세상일에 대해 과도한 법석을 떨지 않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되었을 때 뉴스와 대화의 초점이 전부 코로나에 집중되었다. 거의 모든 지식인이 거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로라하는 신학자들도 거기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 세계가 어떻게 변할 것이냐가 화두였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신자까지 거기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그로 인해 불안해할 것도 없고 거기에 온갖 신경을 집중할 필요도 없다. 역사상 무수하게 왔다가 간 유행처럼 코로나도 한번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생활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설사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떤가? 결국 그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 성취되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 지식이 있다면 그로 인해 법석을 떨 필요가 없다
둘째,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로, 일반 은혜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규칙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 기관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다면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모이지 못하면 교회가 비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혹은 집회를 자제하라는 요구를 교회에 대한 핍박이니 뭐니 하면서 계속 모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 사태 속에서 그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된다.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게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참된 신앙은 고난 앞에서 빛을 내게 마련이다. 코로나를 핑계로 예배를 등한히 하는 사람이 늘거나, 이런 일을 계기로 교회의 헌금이 준다면, 그것을 코로나 때문이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교회의 참된 믿음의 힘이 그 정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코로나 사태는 거품이 빠진 신앙의 진짜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지방자치 단체나 정부에서 지원하는 재난지원금을 그 목적에 맞도록 사용하는 것도 신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경제에 도움이 되느니 안 되느니 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논쟁에 섣불리 끼어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고, 그 사회의 정책 결정자들이 숙고하여 어떤 정책을 내놓으면 그것이 특별히 크게 문제가 없는 한 보통 사람들은 그 정책을 충실하게 따라 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다. 신자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조용히 단정하게 정책을 따르는 것이 신자다운 태도이다.
아무리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사도가 가르친 신자의 정상적인 생활을 따르는 것보다 지혜로운 정책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 황영철 목사 _ 총신대, 영국 Universit of Surrey에서 박사. 저서, <신비체험과 신앙> <다시 겸손을 말하다> <성령과 윤리> <구원과 윤리> <중생과 자기부인> <이 비밀이 크도다> <믿음> <예수님의 기도> <여인의 후손 뱀의 후손> <신명기 강해> 등 다수. 역서로는 <기독교인의 세계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인의 비전> <성경난제백과사전> <맥아더 성경주석> 등 다수가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교학문연구회 간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