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교회의 사명인 이웃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공백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여러 새 개념들과 의견들이 있다. 그 중에 특히나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 온 것은 아무래도 뉴노멀의 핵심인 사회적 거리두기일 것이다. 거리두기와 비대면으로 멀어질수록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역설이 참으로 낯선 두려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사회를 형성하라고 하셨을 때 서로 관계를 끊고 멀찍이 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사회적 관계는 우리의 숙명이고 이웃의 성경적 의미도 변화되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너무 움켜쥐고 살았다는 진단을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이며 쓰고 빌려 주면 풍성해져 더 가득 찬다는 노래를 부르며 나름 노력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개교회 혹은 한국 기독교회 내적인 풍성함에만 집중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교회는 나만 잘 되면 되는 복이 아니라 함께 사랑으로 살아가는 참된 복의 의미를 천착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나만, 내 가족만, 내 교회만, 우리끼리만 잘되어 부흥 성장되고 누리면 그것이 큰 은혜의 최종판이요 자랑거리라고 여기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가령 우리는 타인이 누리지 못하는 좋은 일을 누릴 때 상대적으로 특별한 은혜로 자랑하는 습성이 있다. 상대적 행복감이다. 어떤 좋은 음식과 시간을 누리고 나면 “이번에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이것도 먹고 저것도 경험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렐루야!”하면서 자랑한다. 이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지체들에게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도 준다. 나는 은혜를 못 받아서 누리지 못 하는가 하는 회의감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면에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고기를 평생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고전 10:31)도 맥락을 보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2-33)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라 한다. 금메달을 따거나 연기대상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일상에서 남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며 이웃을 배려하고 그것이 결국 선교적 열매로까지 나타나게 하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이다.
1등을 하거나 나만 크게 누리는 것을 특별한 은혜라고 자랑하면서 이웃과 함께 나아가는 삶이 결여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오히려 멀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우리의 지난 궤적을 통해 보았다. 이는 우리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이다. 6.25 한국전쟁 흥남 철수 때의 예화 중에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 탈출을 위해 필사적으로 승선하려 할 때 미군이 기독교인들을 먼저 태웠다는 것이다. “찬송가 아는 거 불러보라 했는데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찬송으로 통과되어 배에 올랐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간증하는 예화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바람 찬 흥남부두에 남겨진 사람들 특히 비기독교인들은 누가 구원하나.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고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먼저 배에 태우신 것으로만 해석해야 하는가. 또한 기독교인이면서도 배를 못 탄 사람은 은혜에서 탈락한 것인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고 했는데 모순 아닌가. 그게 주님의 뜻인가.
차라리 신자들은 남고 비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태웠다면 어떨까. 선교적으로 보면 무엇이 옳은가. 덕분에 배에 오른 비신자들이 남으로 와서 그 일이 생각나 감동되어 신자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타이타닉호 침몰 때 구명조끼를 타인에 양보하고 자신은 죽어가며 전도했던 존 하퍼 목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오래전 초대교회를 그린 영화 A.D에서 사도는 박해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곧 밤이 올 것이고 우리는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고난에 처한 사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사랑이 무엇인가 질문을 하게 되고 교회는 그에 대한 대답을 실천적으로 준비하고 보여줘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전에도 이제도 교회의 대외적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전파이며 이에 기반한 이웃 사랑이다.
초대교회가 교회의 미래를 보여주었다면 그 미래인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코로나19는 우리를 그 지점에 다시 데려다 준다. 따라서 포스트코로나19에 대한 여기저기서의 많은 논의들이 냉혹해진 사회 속에서 이웃 사랑에 근거한 실효적인 내용이기를 바란다. 아무리 여타의 도그마를 사수하고 변호해도 이 사랑의 도그마에 실천적 진전이 없으면 교회의 유익이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재난으로 상황이 급변해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여전히 존재하고 교회는 선교적이든 윤리적이든 이웃을 위한 사랑과 친밀도를 포기할 수 없다. 그 방식은 일시적으로 변모되기도 하겠지만 재난과 역경으로 사회적 관계가 삭막하게 단절될 때 오히려 사랑의 고리로서의 교회의 역할은 더 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