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논단
코로나19 이후 목회를 생각하다
<이재욱 목사 | 예사랑교회 부목사>
설교와 함께 세례, 성찬을 통해 예배 속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구현해야 한다
요동치는 역사 속에서 바른 교회됨을 추구한 개혁자들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코로나19 이후 목회적 대안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양한 사람들의 견해는 지혜와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대안’은 ‘원안’에 잇대어 있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19를 외치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불분명한 예배와 직분, 교회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맥락으로 정리한다. 먼저 구약과 신약에서의 교회됨의 의미와 그로 인한 예배의 문제를 살피며, 은혜의 방편인 성례와 교회의 직분자로서의 목사직이 어떻게 교회를 세워 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구약성경에서 교회는 ‘카할’(lhq)로 규정할 수 있다. ‘카할’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이다(창 28:3; 35:11; 48:4).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총회’ 혹은 ‘회중’으로 소집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주신다. 이것이 곧 예배(db[)이다(출 5:1; 7:16; 8:1, 20; 9:1, 13; 10:3).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예배는 유월절에서 가시화 된다. “이 달 열나흘 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출 12:6). 이 행위 가운데 이미 온 회중에게 일어나는 카할의 의미, 즉 구원 사역인 양을 잡음으로써 이스라엘 회중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동참하였다. 각 가정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이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함께하는 온 백성의 일이었다.
카할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 거하였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카할에게 말씀을 주신다(신 4:10). 물론 혈통적 이스라엘이 카할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 카할은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 앞에 서는 것이요, 직접적인 순종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량하여 예배하게 하신 목적이었다. 이와 같은 카할의 예배는 구체성을 지닌다. 곧 예배자와 장소, 제물, 절기, 말씀을 모두 포괄한다(신 12:5,11; 16:2; 31:11). 유월절 상황에서 모이지 못했던 부분들을 광야에서는 총회로 모였고, 회중으로 예배한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장소 곧 중앙성소를 지명하시며 자신의 이름을 두신 그곳에서 온 이스라엘로 여호와의 말씀을 받게 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 불과 구름 기둥, 성전에 나타났다. 카할의 예배는 여호와의 영광 앞에 서는 것이었다. 신약에서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곧 십자가에서 드러난다(요 17:4-5). 그리고 부활승천 이후 영광은 하늘로부터 비친다(행 7:55). 하늘은 공간적인 장소를 넘어 구약에서 말한 영광이 존재하는 자리인 것이다. 카할이 여호와의 영광 앞에 섰듯이 신약의 교회 역시 영광 앞에 서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땅의 교회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 방울로 살아야 한다. 즉 교회는 기관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규정성이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시선은 위를 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인 교회 위에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듯 주님께 속한 은덕을 끊임없이 흘러 내리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복은 무엇인가? 추상적인 개념을 예배 속에서 실현되는 은혜의 방편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교회를 언급하셨다. 여기에는 교회를 ‘세우는’(oijkodomevw 오이코도메오) 일이 있다. 교회가 이미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께서 교회를 세우는 주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베드로 곧 사도를 통하여 세우는 일을 이뤄가신다. 이는 사도들을 통해 실현되는 사도적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적인 사도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현장에서 교회를 오이코도메오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사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증거를 나타내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이땅에서 증거하는 사도적 증언자들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사도적 증언을 통해 ‘내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이다.
특별히 사도적 증언은 복음 설교가 전파되는 예배 현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고전 14:3-5,26). 곧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지는 설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예배를 배경으로 한다. 교회는 모일 때 찬송, 가르치는 말씀, 계시 등이 있다. 이러한 예배의 현장은 모임을 추구한다. 모여 있는 현장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배 속에서 오이코도메오 할 수 있다. 또한 세례 역시 예배 속에서 실현된다. 그리스도는 가르침과 세례를 동시에 명하셨다(마 28:19-20). 말씀을 가르치다가 그것이 부족해서 세례를 덧붙인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것과 함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신 것이다. 제자 삼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세례는 결코 모든 가르침 곧 사도적 증언을 통해 예배 중에서 이뤄지는 설교에 열등하거나 부차적으로 덧붙인 것이 아니다. 예배 속에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 성령의 수단이다. 따라서 가르침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설교와 함께 세례를 통해 예배 속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구현해야 한다.
이와 동일한 측면에서 성찬을 배제할 수 없다. 바울은 성찬에 대해 주께 받은 것을 강조했다(고전 11:23). 고린도전서 15:3에서는 부활의 복음을 가리켜 자신이 ‘받은’(paradivdwmi) 것이라 말하였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을 주시는 성찬 역시 받은 것이다. 성찬은 설교와 구별된다. 그러나 성찬의 시행은 설교를 하는 것과 같은 방편이다. 바울은 설교를 전하는(kataggevllw) 것과 동일하게 성찬을 전하는(kataggevllw) 것으로 규정한다(고전 11:26). 즉 동일한 은혜의 방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 복음 전파의 사역은 곧 말씀 전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에 못지 않게 세례와 성찬을 명령하시고 모든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께서 어떻게 ‘내 교회’를 세워 가시는지 요약되는 것이다.
목사 직분의 성경적 근거 중 하나는 디모데에게서 찾을 수 있다. 디모데는 감독이 아니라 사도 동역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에서는 -‘명하다’(paraggevllw)가 많이 나온다.- 이는 위임된 명령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에게, 사도가 디모데에게 했던 임무의 연속성 상에서 하는 명이다. 여기에는 가르침의 일이 있다. 전심전력을 다하는 일이다(딤전 4:10,13). 그리고 이 가르침을 위해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고 한다(4:7). 목회자의 경건은 이 가르침을 위해 전심전력 하는 준비이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가르침 즉 설교에 대해 집중했다면 5장에서는 늙은이, 젊은이의 문제가 나온다. 이는 심방의 문제이다. 설교라는 직무, 그것이 얼마나 사도 동역자로서의 목사에게 핵심적인지를 말하였다면 설교와 더불어 심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5장에 나타난 사항은 구체적인 심방을 통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주는가? 목회의 문제이다. 결코 4장과 5장을 분리할 수 없다. 명하고 가르치는 것과 동떨어진 목회가 아니다. 4장에서 가르침에 대한 전심전력이 일어났다면 심방의 문제 역시 동일하다. 이는 심방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회의 방편으로서의 심방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실현한다(딤전 5:16).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디모데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를 돌보는 디모데의 직무는 사도로부터 받은 것이며, 더 나아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다.
현 시대를 일컫는 뉴 노멀 시대의 특징은 ‘과거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과 체계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한다. 교회 역시 뉴 노멀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코로나19 이후 목회 현장은 많은 변화가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과거를 단절할 수 없다. 벨직 신앙고백의 표현처럼 교회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또한 언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역사 속에서 바른 교회됨을 추구한 개혁자들의 가르침과 선배들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겸비해야 한다. 하나님편에서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공예배의 문을 닫으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께서 은혜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주시길 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한다. 교회됨은 목회를 떠나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교회는 여러모로 혼란을 겪고 있다. 질병에 대한 노출과 감염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는 구약의 회중(카할)의 의미를 매우 축소시켜 버렸다. 이는 구약 교회의 구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도 예배할 수 있다는 협소한 교회론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교회론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온라인 교회의 가능성도 점철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배의 장소적인 개념을 초월하셨다(요 4:21). 즉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이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임을 배제한 예배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새 언약 백성의 총회이다(마 18:20).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를 명하시고, 세례가 베풀어지는 현장 곧 교회 위에 영원한 임재를 약속하셨다(마 28:18-20). 따라서 ‘교회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이 있고,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덕이 있다’는 이레나이우스의 가르침을 우리는 은혜의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더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제공된 모든 선한 것에 참여한 자들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목회의 중심에는 말씀과 성례로 이루어지는 ‘공예배’가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은혜의 방편이 시행되는 공예배를 통해 교회를 세워 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