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현대인의 전염병, 불안 – 『불안 사회』
<이춘성 목사 | 광교산울교회 청년부>
코로나19의 불안 사회 속에서 란터만이 진단하는
광신의 덫이 사회와 교회 안에 작동하지는 않나 돌아보자
지난해에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지금, 책장에 그대로 있던 이 책, 『불안 사회』가 눈에 들어왔다. 불안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회심리학자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Ernst-Dieter Lantermann)이 쓴 이 책의 내용은 독일인 학자의 글이라면 어렵겠지 하는 내 선입관을 깨 주었다. 란터만은 불안은 현대 사회가 지닌 불가항력적인 현상이이라고 규정한다. 어쩌면 인류의 고질적인 병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란터만은 인류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법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자기 확신의 덫
란터만은 심리 실험을 통해 불안을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실험자는 피실험자들에게 동일한 과업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런 후에 성공한 집단과 실패한 집단으로 나누고, 두 집단 모두에게 과업 수행 중에 발생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성공한 집단은 그들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였으며 비판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열려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실패한 집단은 오히려 실패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의 실패를 외부적인 요인으로 돌리거나, 과업을 설계한 실험자들의 문제로 돌렸다. 란터만은 이들의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는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것을 통해 자신들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여 내적인 불안을 해소하려는 방어기제라고 설명하였다. 이 실험은 실패한 집단은 성공한 집단보다 타인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경향이 있고, 오히려 자기 확신의 덫에 걸려 불안에서 벗어나질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중심환원
위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 란터만은 ‘중심환원’이란 심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중심환원’이란 모든 현상을 단순화하여 특정한 어떤 것만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상한 우유를 마신 후에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에 배가 아픈 것도 전날 마신 우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동일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요즘에 자주 쓰이는 용어로 ‘확증편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중심 환원은 긍정적인(positive) 방식과 부정적인(negative) 방식으로 사용된다. 긍정적인 방식의 예를 들면, 어떤 채식주의자는 “채식은 몸에 좋아!”라는 중심환원을 통해 채식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자기 확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란터만은 ‘급진적(radical) 방식’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부정적인 방식의 예로, 또 다른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나빠!”라는 중심 환원을 통해 채식을 어렵게 하는 상대나 외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채식에 대한 자기확신을 강화한다. 란터만은 이를 ‘광신적(fanatical) 방식’이라고 칭한다. 광신적 방식이란 상대를 부정하고 상대의 방식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며, 상대를 우리라는 집단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자신 외부에 있기 때문에 역으로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서 외부를 강하게 부정하고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안 사회의 광신주의
란터만은 현대에 ‘불안 사회’가 더 강화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급진주의자들과 광신자들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 알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의 순기능인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동력에 대해서 긍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급진주의자들이 어떤 계기로 인하여 광신주의자로 변한다는 것이다. 란터만은 광신주의자들의 대다수가 이전에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급진주의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지적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정치의 예를 보면 그 타당성이 상당히 증명되는 것 같다. 예전에 운동권의 대부가 지금은 가장 극우의 선봉에 서는 것, 또는 그 반대로 극우적이었던 사람이 극좌의 선봉에 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 이 둘은 서로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 밖의 외부 세계에 불안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으며, 대다수의 양 극단에 속하지 않는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이들이 조장하는 불안 속에 떨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기능을 하는 급진과 양극화를 만드는 광신의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이들을 만드는 메커니즘은 이 두 집단이 자기 확신을 얻는 그 기전에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이 자기 확신을 획득하는 메커니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을 둘러싼 불안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을 둘러싼 불안한 환경을 극복하기보다는 환경을 인정하고 자신의 기준을 조정함으로써 확신을 얻는 방법이다. 급진주의자는 두 번째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급진주의자들이 외부와의 소통과 자기 성찰이 있고 그로 인한 현실 인식과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신주의자들은 불안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과 이렇게 해야만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강한 의지가 작동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결국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환경을 부정하고 공격해야 하며 자신을 확신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자신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적이며, 악이 될 수밖에 없으며, 불안하게 하는 외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란터만은 이런 양 극단적인 광신이 현대 사회 속에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불안 사회와 복음
코로나19의 불안 사회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란터만이 진단하는 광신의 덫이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작동하지는 않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이 불안 앞에서 직시해야 할 얼굴은 코로나19의 강력한 전염성과 4%에 못 미치는 치명률이다.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절한 방역과 백신의 계발이다. 근본적으로 불안의 해소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의 증폭은 조기에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했다면, 특정 사이비 집단을 통제했다면, 마스크가 충분했다면 등 가정법과 과거에 기인한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언론과 각종 개인 미디어들과 SNS가 생산하는 과거와 가정에 대한 무수한 기사들과 정보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로 인한 불안의 증폭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짓 자기 확신의 길, 곧 광신의 길로 우리가 들어선다면, 광신의 덫에 걸려 불안의 실체와 그 얼굴을 응시하여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진실한 판단의 현재가 없다면, 해결을 위한 미래도 없다. 해결을 위한 연대보다는 분열과 원망, 증오, 불평으로 또 다른 불안이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교회가 이러한 길을 선택한다면 교회는 샬롬(평화)이 아닌 불안과 공포의 진원지가 되고 말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가장 큰 미덕은 믿음과 신뢰이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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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사회 – 혐오와 광신으로 물든 현대사회를 말하다』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 이덕임 역 | 책세상 | 20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