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편지
탐 욕
인간에겐 생존과 쾌락에 연관한 본성적 욕구들이 있다. 먹고 입고 살아가는 일상에 그런 욕구는 긍정적 에너지를 창출하며 삶의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욕구보다 위태로운 뉘앙스의 표현이 욕망이다. 욕망이 자신의 분수나 능력의 한도를 지나쳐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고 누리려 하면 욕심이 된다. 본성적 욕망을 넘어선 욕심을 제어 못하는 지속적 습관이 탐욕(貪慾)이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잘 표현했듯 파멸의 첩경으로 이끄는 것이 왜곡된 욕망, 곧 탐욕이다. 꿈이 너무 야무지거나 비전이 과하면 탐욕이 된다. 애정이 과하면 애착이요 간섭과 독점욕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탐욕의 변용이다. 성경은 탐욕을 금한다(고전5:11). 죄와 결속된 욕망을 죽이라며 탐심은 우상숭배라고까지 했다(골 3:5).
스펄전은 갈 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을 묵상하며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의 부단한 싸움을 말한다. 그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아볼루온(계9:11)의 싸움이 세 시간 뿐이지만 실제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요단강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고 했다. 옛 본성 중에 일평생 가장 강력한 것이 욕심이다. 오죽했으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 했는가. 욕심은 시험에 드는 통로요 자타를 공격하며 고통을 확산한다.
김동인의 단편 무지개는 산 넘고 또 산을 넘어도 잡지 못할 꿈과 행복을 추구하는 야망과 탐욕의 비애를 그렸다. 주인공인 소년은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노년이 되어서야 무지개 같은 야망을 단념한다. 이렇듯 탐욕은 시간을 허비케 하는 속성이 있다. 고비만 넘으면 뭔가 더 이룰 것 같고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출세와 명예와 권력이 잡힐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삶과 사역과 정치도 일탈과 탐욕으로 짓달리기 쉽다. 하나님이 기왕에 주신 은혜들을 감사하며 자족하기보다 점층적으로 더 큰 것을 욕심내며 불평하는 자세는 탐욕의 전형이다. 하나님은 아우성치며 고기를 달라는 백성들에게 일단 메추라기를 주셨다. 그러나 회개나 감사도 없이 게걸스레 먹던 그들은 이 사이에서 고기가 씹히기도 전에 벌을 받았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신앙도 경건도 말씀도 하나님도 안 보인다. 거기가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 아니던가(민11:34).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