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장 9-18절_손성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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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읽는 설교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장 9-18절 

손성은 목사/삼일교회

주님께서 아기 예수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둠에 비취시는 참빛이 되시고 사람들 가운데
에 거하시는 육신이 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성육’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기적을 기념하는 것입
니다. 
성탄절을 보내는 것은 바로 성탄의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죄인되어 원수가 되기조차 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 성탄절입니다. 문제는 그 상자를 받아놓고는 열어보지 못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란 선물을 받기는 받았는데 전혀 그 선물을 누리고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물 상자를 받아놓고는 열어보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선물 상자를 열어보고는 예수님 안

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들(골 2:3)을 즐기고 있으십니
까? 

1. 지금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는 그 보물상자 속의 보물들을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
해 놓고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을 깨닫게 되니 은혜 위에 은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 “은혜 위의 은혜”가 특별히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은
혜”임을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말은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하지
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장막을 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머무시
는 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하였을 당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에 
계시지 아니 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
금 현재)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는 것도 보고서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
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보았더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
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14절). 그 충만한데
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고(16절), 계속 받게 되니 은혜 위의 은혜가 되
는 것입니다. 한 번 받고 마는 것이면 은혜 위의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시는 예수님

왜 이 대목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해서 언급
하시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을 충만한 가운데 목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
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
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나는 거듭난 자들은 예수 그리
스도의 영광을 목도하고 자기들과 지금 함께 거하시는 그 은혜,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18절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
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
신 하나님이 나타내셨
느니라.” 무엇을 나타냈다는 것입니까?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
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이때까지는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본 사람들
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보고 그 보이시는 하나님을 지금도 계속해서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제자들 중의 한 명인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꾸중하셨지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며 교제하는 우리

문제는, 빌립은 예수님을 보아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우
리는 빌립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을 보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우리야말로 이렇
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물론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그것은 재림하실 때에 ‘그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고 한 것
처럼 온 천하의 사람들이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
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면 어떤 공간이나 시간 내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공간과 시간에 갇혀 계시지 않고 시공
간을 초월하셔서 계시기 위해서 승천하셨고, 그렇게 승천하시는 것이 팔레스
타인 지역에 제약되어 존재하는 것보다 제자들에게 더 좋겠다고 하셨던 것입
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더불어 함께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냥 “아멘”이라고 습관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지요!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
니다. 하나님되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기적인 것처럼, 멸망당할 죄인
인 우리가 의인으로 여겨지고 그 본성이 바뀌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 
감각을 갖게 되고 계속 하나님이 그 중
에 거하시는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
는 것은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으로 이제 우리 가운데 지금도 거하시는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즐거
움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
고, 어거스틴이 그렇게 살았고, 루터와 칼빈이 그러했습니다. 청교도들이 그
렇게 살았습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것을 환기시키면서 이 은혜 위의 은혜를 
증거하는 기회가 됩니다. 

마치는 말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12월 26일을 ‘선물의 날’(Boxing Day)이라고 합니
다.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 가령 예를 들면 신문배달부, 우체부, 아파트 
관리인 등등 주변의 소외되거나 고마운 분들에게 조그만 선물로 사랑의 관심
을 보이는 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베푸는 것이 성탄절 문
화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온 산을 뒤덮어 놓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성탄
절기의 전통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전통을 잘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은혜 위의 은혜”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
데 지금도 계속 거하시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께서 오셨
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것을 우
리가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탄의 즐거움, 기쁜 성탄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과 기쁨으
로 성탄절을 기다리고 또한 사랑의 아름다운 헌신과 섬김들이 풍성하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면서 이에 말씀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