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의미”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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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의미”

김명혁 목사_강변교회

성탄의 달 12월이 오면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북 치는 어린 소년 
라팜팜팜” 등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러 퍼진다. 
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교환한다. 
성탄은 즐거운 계절이다. 이 세상의 여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탄
은 이와 같은 즐거운 계절이다. 성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탄의 의미가 여기에 그치는 것일까? 
성탄은 흑암과 사망의 땅에 생명과 소망의 빛이 비추인 기쁨의 절기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
이 비취도다”(사 9:2). 

캐럴 울리는 성탄절

여기 흑암과 사망의 땅은 유대와 예루살렘 땅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이방의 
땅을 지칭했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
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
느니라”(사 9:1). 
히브리 역사의 관점에 볼 때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성탄의 밤
과 새벽에 현실로 나타났다. 유대와 예루살렘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아닌 동
방에서 온 이방인 박사들에게 성탄의 빛이 비취었고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
수에게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유대 나라에서 멸시를 받던 천민 목자들에게 성탄의 빛이 비취었고 목자들
이 아기 예수에게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성탄의 의미가 흑암과 사
망의 땅에서 살던 ‘이방인들’과 ‘천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다.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동방 박사들
이나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께로, 아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어린양 주님께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 할 것이다. 
그 모습이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으로, 백부장 고넬료의 모습으로 또는 예수
에 미쳤던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 모습이 고통의 몸으
로 수 천 개의 찬송시를 써서 부른 패니 크로비의 모습으로 또는 ‘예수 그 
이름’을 온 몸으로 노래한 송명희 시인
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
다.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둘째로, 흑암과 사망의 땅
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천민들’을 찾아
가서 그들에게 사랑과 생명과 소망의 손길을 펴는 일이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는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조선 땅에 찾아와 그 사랑을 바로 전하며 실현한 사람들이었다. 지금 
아프칸에서 사역하고 있는 윤주홍 선교사는 오늘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다
면 어느 곳으로 오실까 생각하다가 아프간으로 오실 것이라 나에게 말해주었
다. 
성탄의 계절을 맞아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살지는 못해도, 모슬렘과 집시
들과 북한의 병든 자들을 직접 찾아가지는 못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무릎 꿇고 주님께 경배하고 그리고 주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몸짓이
라도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의 봉투 전달해

우리는 지난 12월 8일 아침 우리 주변에서 살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
랑의 손길을 펴는 작은 몸짓을 했다.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주제를 가지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원들이 

함께 모여서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사랑의 손길을 폈다. 
노숙자 7명, 조선족 동포 7명, 탈북 동포 14명, 장애우 7명, 소년 소녀 가
장 7명, 외국인 노동자 14명, 몸 불편한 은퇴 여교역자 7명, 몸 불편한 은
퇴 목회자 7명, 음성 나환자 성도 7명에게 11교회의 목사님들이 사랑의 봉투
(20만원)를 가지고 와서 전한 다음 모두 함께 ‘사랑의 종소리’를 부르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8교회가 정성을 모아 북한 결핵 환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봉투(1천 
3백 7십 만원)를 스티브 린튼 박사에게 전달했다. 
강변교회는 12월 17일 저녁 13번째 “사랑의 음악회”를 열어 강남구에서 선
정한 불우 이웃 45명과 탈북 동포 5명에게 사랑의 봉투를 전했다. 
성탄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는 시대가 되었다. 보배합을 열거나 옥합을 
깨트려 주님께 경배하는 일이 아득한 옛 추억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망과 위로와 사랑의 손길을 펴야할 불우한 이웃과 이방인들이 모두 우리와
는 상관이 없는 멸시와 증오와 정죄의 대상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지 모
르겠다.